해. 마. 루.

#8

by 이다

산타모니카 비치의 어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방금 전에도 지는 석양이 있었는데, 금세 주위는 어두컴컴해졌다. '산타모니카의 석양을 보면 LA여행 다 한 거다'라는 가이드의 말이 새삼 와닿았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구나. 왜 멀쩡한 대낮의 해변을 놔두고 굳이 저녁에 해변을 데려왔냐는 말이 쏙 들어갔다.


6시간의 버스 이동으로 몸은 노곤노곤했다. 또 밥을 먹을 차례였다. 배가 빵빵해지고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만 먹고 싶어요~ 하다가도 식당에 들어가면 열심히 먹게 된다. 이곳이야 말로 돌밥 돌밥이다.


이번엔 어디로 가려나. 기대감과 함께 다시 버스에 올랐다. 저녁시간이 되니 가이드가 강조하던 트래픽이 시작된다. 도로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차들이 고속도로의 정체인 것 마냥 끝도 없이 줄을 서있다.


그러나 지친 여행자들이 올라탄 어둠 속의 버스에는 임영웅이 있다. 적당한 타이밍에 아이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듯, 적당히 피곤한 타임이 오면 가이드는 임영웅 DVD를 틀어준다. 아무 말이 필요 없다. 영웅님이 화면에 등장하면 여기저기서 웃음과 탄성이 나온다. 정말 세상 편한 '흐흐흐' 가이드다.






어느새 차는 시내로 접어들었다. 처음부터 이상하게 생각되던 그것, 시내 길 곳곳에 텐트가 보인다. 물건도 길바닥에 마구 돌아다닌다. 집회라도 하는 건가, 하는 찰나 가이드의 설명이 뒤따른다. 저 텐트의 정체는 홈리스의 집. LA의 심각한 문제. 그것은 다름 아닌 홈리스였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곳이 미국이란다. 잘 사는 상위 계층, 그렇지 못한 계층이 철저히 분리되어 살아가는 곳. 그러고 보니 동네마다 인종과 국적으로 잘게 잘게 쪼개져 그들만의 리그와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는 코리아타운, 저기는 멕시코마을, 또 저기는 흑인동네.


내가 생각하던 미국은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집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텐트를 치며 살아가고 있다니. 오 마이 갓. 서울역 노숙자는 들어봤어도 길거리 텐트에서 살아가는 미국인 이라니. 가는 길마다 펼쳐져있는 생뚱맞은 텐트와 그 앞을 굴러 다니는 운동화라니.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가 내린 곳은!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으로 설렁탕을 먹었던 그곳, 해. 마. 루.

뭐야. 해마루랑 계약이라도 했나. 24시간을 고아 만든 설렁탕 국물이 맹탕이었던 그곳에 다시 오다니.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기야 하다만, 어째 이건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순간 임영웅 디너쇼가 시작된다. 뭣이 중헌디! 맛? NO. 영웅님이 반겨주는 식당이야. 들어와 들어와.


"오늘의 메뉴는 불고기와 오징어볶음입니다. 네 분씩 앉으시고 맛있게 드세요"


그래. 설렁탕 아니니까 다행이다.

엄마, 뚱이, 나 그리고 다른 영웅시대 한분이 겸상을 했다. 전직 선생님이셨던 분인데 뇌경색이 와서 귀도 잘 안 들리고 몸의 반쪽이 불편하시다며 연신 이야기를 하신다. 딸이 여행을 보내 주어 오셨다며 영웅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설명해 주신다. 영웅시대의 특징. 자리에 앉으면 임영웅님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한다는 것.


불고기가 끓고 있다. 오징어 볶음도 나왔다. 그래, 이왕 온 거 맛있게 먹어야지.

불고기 국물을 한 입 맛보는데, 엥. 맛이.... 없어.

배도 빵빵한데 잘 됐다. 조금만 먹자. 오징어 볶음은 한 입만 맛보자.


"불고기 맛없게 하기도 힘들지 않냐?"

뚱이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 순간 카톡이 울린다. 정인이다!

"호텔 와 있는데 만날 수 있어?"

"나, 지금 저녁 먹어. 호텔로 돌아가는 시간이 한 시간쯤 걸린대ㅜㅜ"

"그렇구나. 난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하고 퇴근하고 들러봤어. 어쩔 수 없지 뭐."

"왜 연락도 없이 온 거야!"

"빨리 만나고 싶어서^^ 난 괜찮아."

"미안해.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 얼른 집에 가. 미안해 ㅜㅜ"

"알았어. 난 진짜 괜찮아. 곧 만나!"

"내일은 내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연락할게. 그때 나올 수 있지?"

"그럼"

"고마워. 내일 만나!"

해. 마. 루. 맛도 없는데 호텔에서 멀기까지 한 곳!

해마루가 미웠다. 해마루가 미운만큼 친구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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