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를 만나다

#10

by 이다

참으려 했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뚱이와 나는 여지없이 끄덕끄덕 인형이 되었다. 버스의 미세한 흔들림이 요람처럼 우리를 재웠다. 시내에 들어서니 트래픽이 한창이다. 이제는 그러려니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본다.


"오늘 저녁은 아시안 뷔페로 준비했으니, 많이 드세요"


뷔페? 대식가인 나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이름이다.

그런데... 맛난 음식을 앞두고 식욕이 돌지를 않는다. 돌밥돌밥은 계속했는데 그분은 안 오시고, 배는 점점 빵빵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먹어야지, 태국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나시고랭과 통통한 새우를 잔뜩 담았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나와 컴컴한 주차장을 둘러보니 양 옆이 쇼핑센터다. 밥도 먹었겠다, 뚱이와 산책 삼아 신발을 구경하는데 드디어 신호가 온다. 손님이 300명은 되어 보이는 뷔페식당에서 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쩔 수가 없다... 드디어 그분이 오신다! 달려 달려!






역시 뱃속이 편해야 해! 밖으로 나오니 저녁 공기가 더없이 상쾌하다!

싱글벙글 웃음이 연신 나온다. 이제 몸도 이곳에 적응한 건가!


7시가 다 되어 정인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정인아, 여기서 숙소까지 20분 정도 걸린다는데 8시쯤 호텔에 도착할 것 같아. 오늘 만날 수 있어?

오케이! 8시까지 호텔로 갈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까지 최고다.

그나저나 이곳은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해가 들어 옷을 벗기질 않나, 순간 목도리를 둘러매게 하질 않나. 가끔 헐리웃 스타들이 플리플랍에 패딩이나 코트를 입어 왜 저런 패션을 할까 생각했었는데, 내가 저러고 있다. 역시 상대방의 입장이 돼 보아야 이해의 눈이 열리나 보다.


이제는 정이 들어버린 익숙한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곧 있으면 정인이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친다. 20년을 못 봐서 '날 못 알아보면 어쩌나, 늘어난 주름에, 달라진 내 모습에 어색해하면 어쩌나'를 걱정하며 로비로 내려갔다. 엄마와 뚱이도 정인이를 알기에 인사차 같이 내려갔다. 아우 두근두근.


어디 있니. 정인아. 주차장을 둘러본다. 나와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두리번두리번하는데 저기, 럭셔리 하얀 승용차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온다.


"앗! 정인아"

정인이를 보자마자 언제 두근댔냐는 듯 와락 껴안았다. 시간이 흘러 마흔이 훌쩍 넘은 정인이의 마른 몸이 만져졌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안녕 뚱아. 숙소에 들어가서 드시라고 와인과 초콜릿을 준비했어요"


엄마도 뚱이도 얼떨떨한 만남에 연신 웃는 얼굴이다.


"그래 고마워, 좋은 시간 가지고 즐겁게 놀다 와"


두 사람은 총총 사라지고 정인이와 나만 주차장에 남았다.

꺅. 진짜 뭐야. 우리 다시 만난 거야! 왜 이렇게 말랐어! 그런데 왜 이렇게 똑같아!

너도 마찬가지야! 넌 역시 엉뚱한 게 어울려! 어제도 만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밀린 말을 뱉어내느라 정신이 혼미하다.


일단 이동하자. 응 그래. 너 운전도 잘한다. 이곳에서는 차 없이 살 수가 없어. 난 버스를 타본 적이 없어. 차가 없으면 생활이 안 되는 곳이야. 그렇게 처음 운전하는 정인이의 차를 타고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쇼핑몰의 한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걸까. 커피를 마시는 동안, 20년 동안 밀린 이야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살아온 이야기. 나이가 나이인지라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된 건강이야기, LA에서 살아온 이야기, 집안 식구들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정인이는 아버지가 목사님이라 이곳에 이민을 왔다. 그러다 뉴욕에서 심리학 대학원을 다녔고 이곳에서 심리상담사로 일하는 중이다. 그것도 영어를 쓰는 백인들을 상대로. 나 지금 심리상담 선생님과 대화하고 있는 거였니. ㅋㅋㅋ 그런데 우리의 대화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우리는 시간만 20년을 점프해 이곳에 와있다. 밤을 새라면 셀 수도 있는 금요일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커피숍이 문을 닫았고, 호텔로비에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의 대화를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춰버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계는 11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숙현아, 피곤하겠다. 이제 그만 자러 올라가. 나 이제 일 년에 한 번씩은 한국에 가. 그러니까 우리 그때 또 만나자."


"응. 꼭 그러자"


차에서 내리려니 기다렸다는 듯 눈시울이 붉어진다. 흑흑. 잘 가 정인아. 잘 자.


"사랑해, 숙현아"

"사랑해, 정인아"


정인이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내 친구, 정인이.


어릴 적, 조금은 다가가기 힘든 아이였던 우리 반 똑똑이 부반장 정인이. 그랬던 나에게 언제나 먼저 다가와 환히 마음을 열어 주고 엉뚱한 나를 좋아해 주었던 친구 정인이.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자주 못 만나도 인생친구 한두 명만 있음 되는 그곳에 늘 자리하는 내 친구 정인이. 영웅님께 감사드린다. 정인이를 만날 수 있게 이곳에 데려와 주어서. 정인이가 선물해 준 초콜릿은 고이고이 싸들고 와 지금도 하루에 몇 알씩 먹는 중이다. 책상 위의 초콜릿을 보면 문득 정인이가 생각난다.


그나저나, 그 많은 사진을 찍었던 내가, 말하는데 정신이 팔려, 정인이와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런 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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