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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n 10. 2022

쥐와는 다르겠지만

사람, 외로움, 그리고 소통

"아주 담담한 얼굴로 나는 뒤돌아 섰지만
나의 허무한 마음은 가눌 길이 없네
...(중략)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
(변진섭, <홀로 된다는 것> 중에서)


 둘리, 변진섭 님. 나 마이콜의 친구다^^ 국민학교 시절 희한하게도 어린 나의 갬성은 이분의 노래와 맞닿아있었다. 그 후로, 이승환, 신승훈을 거쳐 윤도현과 이적으로 넘어왔다. 여전히 변진섭 님의 애절함은 내 현재의 한 부분을 맡고 있다. 이 분이 부른 많은 유명한 노래가 있다. '너에게로 또다시', '새들처럼', '숙녀에게',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등등. 소위 그 많은 히트곡 중에서 전세대를 아울렀던 변진섭 표 탑골 가요는 '희망사항'이 아니었나 싶다. 어? 변진섭이 이런 노래도 하나 싶은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의문이었으리라. 이런 마음들이 합당했구나 라는 걸 최근에야 확인하게 되었다. 영심이 누나와 함께 한 이곡은 원래 변진섭 님이 안 부를 수도 있었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여하튼 이런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이 '홀로 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연인의 이별에 대한 곡이다. 그런데, 좀 더 보편화시켜보면, 우리는 누구나 '나'와 '너'의 크고 작은 헤어짐을 매일 매 순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뒷감당(?)을 해나가는 것이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며 살아간다. 학교, 직장, 거래처, 군대, 종교, 연인, 가족, 심지어 오늘 아침에 만난 카페 바리스타까지도.


 범위를 나 자신으로 좁혀보자. 나에게 홀로 된다는 것은 여태껏 적응 안 되는 놀이기구 같다. 최대한 피하고 또 피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 순간이 되면,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오우 노!!!) 청룡열차 위에 있을 때처럼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뭔가 쑤욱~~~~~ 떨어지는 그 느낌. 정말 싫다. 그렇게 나는 down(우울한)되어버린다. 아, 눈을 떠보니 멈춰 섰다. 현실이다. 그렇게 다시 홀로 있다. 일종의 '회피'라고나 할까? 얼마 전 시청한 인터넷 영상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상대의 방어기제를 잘 파악하라는 정신과 의사의 강연을 시청한 적이 있다. 정말 놀랍게도 나는 지금 결혼을 해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으나, 사회적/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정신적으로도 혼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나면 역시나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것은 여전하다.  

 

 회피라는 방어기제는 나의 인간관계, 사람과 엮이는 내 모습에서 갑툭튀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여 애증 관계에 놓여있는 방어기제이며,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랑이 식상함으로 전락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추운 마음이 된다."1)


 회피를 정의하는 다양한 전문적 시도가 있다. 하지만, 나의 정의는 이 구절에서 실마리를 얻는다. 특별함이 식상함이 되는 순간. 그 순간이 너무 뻔히 보일 때. 때로는, 현실이 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만 부여되던 그 특별함이 식상해지는 상상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 내게는 그것이 회피의 기제가 작동되는 방식이다. 눈을 감으면, 앞이 보이는가? 잔머리를 굴려서 대충 몇 걸음을 어디로 디디면 갈 수 있겠다 싶지만, 30초나 갈 수 있을까? 옆에서 보는 사람은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눈 감고 잘 걸어가도, 정작 가고 있는 나는 불안하기만 하다. '이게 맞나?', '부딪히는 거 아냐?', '정말 웃기게 보일 것 같은데.' 회피는 그런 식으로 나라는 사람을 자신감 없는, '진짜' 식상한 인간 인양 살아가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가장 추운 마음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청소년-청년-장년까지 스스로를 볼 품 없는 사람이라며 오해하고 살아왔다.


 쥐에 관한 실험을 한번 보자. 날 때부터 혼자 둔 쥐와 북적북적한 우리네 명절 시골 같은 분위기에서 자라게 둔 쥐가 각각 있다. 혼자 지낸 쥐의 뇌에서 특정 영역이 활성화된다. (얼마만큼 보편 타당화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러 쥐 사이에서 지낸 쥐에게서는 그 영역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혼자 지내던 쥐를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 사는 쥐들 사이에 집어넣은 후, 조금 있다가 다시 혼자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특정 영역의 활성화는 여전히 가열차게 진행 중이었다. 외롭게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쥐가 여러 쥐들과 함께 지냈다고 해서 환경과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이 쉬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로움에 대한 약한 면역기능을 활성화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쥐와는 다르겠지만... 아니, 달라야 하고, 다르기를 바라지만, 어이없게도 이 쥐 실험에서 나는  나를 본다. 혼자 있을 때는 외롭고, 같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혼자 있을 때는 같이 얘기할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다 싶다가도, 누군가 다가오면 의심과 (나도 모를) 냉소로 스스로를 혼자 두는 만행을 저지른다. 회피다. 모든 방어기제가 나쁘지 만은 않다. 말 그대로 자신을 지켜줄 목적으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피는 위기를 피해서 자신을 지키게도 하지만, 긍정적인 상황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낯선 상황, 즉 (이제까지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 과정을 지나쳐 버리게 만든다. 쉽게 말해서, '어, 뭐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라는 식의 생각이 발동되며, 좋은 일도 치워버린다. 이게 자리를 잡으면, 줘도 못 먹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회의주의와 냉소주의로 철저히 무장한 튼튼한 성이 될 수 있다. 앞서 내가 20대에 결혼을 못 할 수도 있겠다고 말했던 것의 상당한 지분은 바로 요놈이 차지하고 있다.


 드라마 <도깨비>. 나는 이곳에 와서야 보았다. 그런데, 원제가 도깨비인 줄 알았는데, 그 앞의 제목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쓸쓸하고, 찬란하神(신)'. 드라마를 보면 이해가 되지만, 왠지 찬란이 쓸쓸에 묻혀버린 느낌이었다. 신도 이런데 하물며...

너와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두 좋은 날들이었다   

 회피하며 홀로 된다는 것이 당연한 듯 살아온 쥐새끼가 내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고개를 서서히 들고 저렇게 고백할 수 있는 날을 누릴 것이다. '너'와 함께 '우리'를 이루며.



20200412 13:37


1) 전미정,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위즈덤하우스, 2012,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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