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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n 09. 2022

한 번 더 쓰기라도 해야지...

사람, 외로움, 그리고 소통

 "숫자에 있는 곡선은 사랑을 나타내고, 교차점은 시련을 나타내며, 가로줄은 속박을 나타낸다... 4는 인간이다. 이 숫자에는 시련과 선택의 갈림길을 뜻하는 교차점이 있다. 인간은 3과 5의 교차로에 있는 존재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 현자가 될 수도 있고, 동물의 단계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중에서)

 사람. 누구나 한 번 이상 고민했을 이 단어. 15개의 작대기, 3개의 자음과 2개의 모음으로 구성됐지만, 우습게 볼 수 없다. 비틀어보면 사람이 2명이나 들어있어서 더 똑디 볼 수밖에 없다. 'ㅁ'을 조금만 흘려 써도 곧바로 자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랑'으로 읽혀버리기에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인도에서 고안된 알파벳의 기원에 대한 베르베르의 말에서도 비치듯,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죽을 때까지 이해 안 되는 것은 우주의 기원도, 외계인이나 UFO의 유무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근원지도 아니다. '나'와 '너'다. 왜 그딴 식으로 말하는지, 왜 날 보고 그런 표정을 짓는지, 왜 내가 없을 때 좋지 않은 얘기를 내뱉는지, 그래서 도대체 얻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너' 사이의 간격은 어쩌면 우주만큼의 길이와 너비의 신축성을 지닌 고무줄이 잡고 있는 듯하다. '다가가면 뒤돌아 뛰어가고 쳐다보면 하늘만 바라보고'(조덕배,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가까워졌다 싶으면 떨어지고, 멀어진 듯하면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마음을 나누려고 해도, 무엇이 그렇게 맘에 안 드는지 나를 지나가는 개 쳐다보듯, 아니 그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개는 귀엽기라도 하지, 나는 귀엽지는 않아서일지도 모르지ㅜㅜ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사람 이야기이기에 아직도 나는 고민하고, 신음하고, 아파하고, 눈치 보고, 다시 용기를 낸다. 그러다 보니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있고, 내일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나 시뮬레이션해본다. 죽을 때까지 이해 안 되는 많은 것들은 그쪽에 차별화된 분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오롯이 맡겨드린다. 오늘 당장 내가 살아내야 할 시간들 속에 함께 엮이게 될 사람들을 이해하고, 내치는 것은 완전 나만의 개인적인(동시에 전 우주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상호 이해의 유무와 과정이 나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우주가 언제 시작됐는지를 알면, 놀랍고, 엄청난 발견이지만,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가족들과 투닥거리며 사는 내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지는 못한다. 외계인이 있다면, 4차 산업혁명이나 인류의 나아갈 바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공하는 기반이 될지언정, 오늘 내가 맞닥뜨려야 할 '너'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무 무식한 소리를 했나?^^;;


 인도인들이 숫자에 기여한 역사적 업적이나 그 기원 따위에는 사실 별 관심 없다. 그 해석이 내 눈길을 잡았을 뿐. 시련과 선택의 갈림길을 뜻하는 교차점에 있는, 인간. 현자가 되느냐, 동물이 되느냐. 사실 이분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어떨 때는 욕실 거울만 봐도, 익숙한 얼굴에 지혜가 묻어있을 때도 있고, 또 어떨 때는 '니가 정말 사람이야?' 싶을 때도 있다. 나만 그런가? 처한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인격과 정체성을 빚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자이기만 한 사람도, 야수 같기만 한 사람도 없다. 그런 얘기도 있지 않나. 비폭력저항 운동의 상징이자, 시대의 정신인 인도의 성자, 간디도 인종차별의 가해자였다는. 그 또한 간디가 선택한 결과였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연유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4에 대한 해석이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이 아닐까? 20대는 결혼을 못 할까 봐 전전긍긍했고, 30대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고자 애썼다. 40대가 되고 나니 다시 원론적인 이슈와 마주했다. 균형감각. 사회생활의 줄타기도 아니고, 사실과 거짓을 희미하게 만드는 물타기의 차원도 아니다. 현자와 동물을 오가는 사람의 본능? 성질? 그 말이 무엇이든, '그것'이 올바른 방향을 잡으려면, (나의 개인적 경험에 한정하여) 균형을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40대인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이슈가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삶에서 이 '균형'을 잡아나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미쳐서 할 수 있는 것'(something to inspire me, not to mad)이다


 나는 해외에서 살고 있다. 사람 이야기를 하던 내가 갑자기 해외로 이슈를 전환한 것은 너무 진지해진 글에 물타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고민에 기름을 주유소 체로 들어부은 사건들이(?) 이 곳에서 있어왔고, 지금도 그 소용돌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디테일하게 그리는 것도, 실명을 거론하는 것도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 답답함이야 남겠지만, 그 속에서 내가 겪은 외로움과 쓸쓸함, 답답함과 고구마+감자 50개씩, 배신감과 깨진 뒤통수에 대한 자기 보상은 '쓰기'를 통해 가능하리라고 믿어 이러고 있다. 그래서, 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이 '쓰기라도 해야지...'인 것이다. 두 번 밖에 쓰지 않았고, 실제 겪은 이야기들을 나눈 것은 별로 없는데, 첫째 글의 끝마디에 쓴 것처럼, 조금 숨통이 트인다. 살 것 같다. 감사하다.


불현듯 햄릿의 대사가 마음에 훅 들어온다.

"To be or not To be."  


202004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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