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콜과 구공탄 Jun 09. 2022

쓰기라도 해야 살 것 같아서...

사람, 외로움, 그리고 소통

하(도 혼자 있다보니)
수(다 본능이 나처럼 움츠러든)
구(입들과 함께 하고 싶다)


 하수구가 막혔다. 내려가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은데, 마냥 기다려야 한다. 대기조가 떠나야 다음 조가 갈 수 있는데, 도무지 출발할 기미도, 주근깨도 보이지 않는다ㅠㅠ


 여기는 한국이 아니다. 한국의 퍽퍽한 월급 인심과, 하던 일이 한국 문화에서는 그때까지 도무지 (현실적인) 비전이 없구나 싶어 살아보려고 해외로 눈을 돌렸더랬다. 자녀들이 어느 정도 큰 집의 어머니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종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정말 그때는 밀물처럼 아지매들이 들이닥쳤던 그 전공을 나는 공부했다. 그래서 아직 애들이 갓난쟁이였던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던 것일까? 전세 9천 남짓 한 돈으로 입에 단내 나면서 서울의 달을 5년 정도 보았다. 그래도 행복하고, 감사한 시절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의 첫 숙박은 대학원 기숙사. 빨간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강남역으로 가는 버스를 자신 있게 올라탔다가 체크카드에 2천 원이 넘는 숫자가 찍히는 걸 보고, '헉!!' 하며, '역시 서울이란 말인가. 버스비도 막강 서울이구만.' 했던 생각이 엊그제다. 졸업 후, 3년 남짓 일했던 경기도로의 출퇴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직장 동료들과 복작거리며 일했다. 감사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풀타임인데도, 나 혼자 200이 안 되는 월급을 갖다 주면서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직업을 고수하기에 나는 그다지 꼿꼿하지도, 열정의 비저너리(visionary)도 아니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더 큰 문제는 나는 흔히 말하는 '현실주의자'가 아닌 '이상주의자'쪽으로 2/3 이상을 넘어간 사람이었다는 점.......... 이런 내가 이곳에서 벌써 3년 해외생활을 맞이하고 있다.


 그럼, 나는 이제 와서 왜 여기서(온라인) 이러고 있나(글 쓰고 있나)?

 첫째, 외로워서다.

 둘째, 말할 데가 없어서다(영어도 장애물이긴 하다^^;;)

 셋째, 답답해서다.

 넷째, 막막해서다.

 다섯째...

 이러다 보면 계속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여기서 stop!  


 한 마디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체감하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해볼까 라고 생각하는 수준까지 30년 정도 걸린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 앞에 서야 할 일이 생기면? 마음에 하고 싶은 질문이 10가지는 족히 되는데 강의실을 둘러보니 악! 이렇게 넓었나 하며 쭈구리로 남았다. 비등한 예로, 죽을 용기를 내서 이것을 극복하고자 대학 축제 때 교내 어학원에서 주최한 스피치 대회가 기억난다. 결과는요?!!!! 60초 후에 공개되면 안 되니, 지금 바로 써본다. 2등이었다! 초대박! 그런데 그 과정이 참 눈물 난다ㅠㅠ 그렇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외워간 내용이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증발해버렸다. 축제의 달 5월에 봄바람 휘날리며 날아가버렸다. 무념무상이 올 바로 그때쯤! OMG! 3초나 됐으려나?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방 중앙도서관을 향해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유체이탈을 경험했다면, 아마 내 영혼도 부끄러웠을 신스틸러였다.


 "먼 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 내게 시간은 그만 놓아주라는데~~~~" 당시 내가 끼고 들었던 윤도현의 '너를 보내고'. 정말 시쳇말로 "형이 왜 거기서 나와??"가 똑 들어맞는다. 입과 머리의 입장이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아, 대뇌활동과 신체활동이 이런 식으로 다르게 나올 수 있구나를 처음으로 경험한 때인 듯하다. 원고를 하얗게 태워버린 그 시점에서 나의 대뇌는 윤도현 형님의 노래를 방언처럼 재생시킨 것이다. 이런 미친...(그 날 이후, 며칠 정도 강의를 안 들어갔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게 내성적이고, 자신감 없고, 위축되어 있고, 앞뒤 못 가리는 모습으로 살아간 나의 20대를 이런 식으로 공개하고 있다니... 살려고 쓰는 글이지만, 나도 어이가 없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나는 또 그렇게 한 번의 숨통을 트이며 20대의 한 꼭지를 살아낼 수 있었음에 다행이다. 40대인 지금 또다시 숨통이 조여 오지만...


20200410 22:23

작가의 이전글 보물과 폐물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