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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n 09. 2022

보물과 폐물 사이

사람, 헌책, 그리고 소통

얼마 전 늘 보고 싶어했던 책 한권을 중고로 구입했다. 중고 상태에 따라 최상, 상, 중, 하로 나뉘는데, 원가의 절반 이상이면 나는 늘 무조건 상을 샀었다. 이 책은 가격이 1/3 정도였는데, 상이었다. 당연히 재빨리 구입했다. 받고 보니 이런... 완전 쌔책이다. 아싸!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첫 페이지를 넘기자...


김OO에게... 2017. OO. OO에


어떤 분이 지인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선물 받은 사람이 책을 팔았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이런 저런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무슨 연유였을까? 글씨체로 보아 연세가 있으신 분이 선물하신 책 같은데... 책 상태로 봐서는 손도 안 대었거나 정말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읽은 것 같지만, 아무리 봐도 책을 읽은 흔적은 없어 보였다. 구입한 책의 내용상 무협지나 요즘 웹툰 읽듯이 넘길 수는 없었을테니.


영어 표현 중에 between the lines 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선과 선 사이다. 어떤 글을 읽어보면, 지금 읽는 줄과 그 다음 줄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몇 센티 정도 밖에 안 될지 몰라도 컨텍스트를 음미해보면 엄청난 이야기와 얽히고 섥힌 상황이 존재한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많은 사연들을 말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책을 선물하신 분과 김OO이 선물을 받은 각자의 시공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김OO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책을 팔게 되었을까? 선물 받긴 했어도 자신에게는 큰 흥미가 없거나 달갑지 않은 내용이라 팔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사연 많은 책을 나는 지금 뚫어져라 읽고, 메모하고, 나름의 묵상을 남기며 독파하고 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인 내가 중고로 이 책을 사서 커다란 호기심으로 정독을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내 어린 시절에는 헌책이라 불렀다. 온라인 서점이 활성화되면서 '중고도서'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풀어보면, 누가 다 읽거나 읽다가 말아서 더 이상 원주인에게 필요가 없어 시장에 내놓은 책인 중고도서인 셈이다. 나도 너무 어려 잘 기억도 안나는 80년대에는 책 뿐만 아니라 음반도 구하기가 어려워 책이나 음반을 쌓아놓은 집에 가면 음... 꽤 잘 사는군 하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헌책에는 추억이 있다. 어떤 사람의 손때가 묻고, 눈길이 머물고, 사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의미있고, 삶을 돌아보게 해준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중고도서 시장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사고 안 보는 책, 다 보고 더 이상 눈길이 안 가는 책,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책 등의 다양한 헌책들이 그 의미와 필요에 부합한 수요를 따라 새주인을 만나게 된다. 그 책의 원주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한때는 보물이었을 그 책이 이제는 폐물 취급이 되어 보물로 맞아줄 새주인에게 건너간다는 것. 궁상맞지만 좀 서글프다. 반면에, 더 이상 읽지도 않고, 눈길 조차 주지 않는 책들을 방 구석구석, 없는 공간 만들어 쌓아놓고, 책장을 사서라도 꽂아 보관을 넘어 사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면서...


책에는 그 사람이 있다. 보물이다.

새주인을 찾아가는 헌책은 또 다른 삶을 선사해주러 떠난다.

헌책이라고 폐물이 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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