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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l 01. 2022

1-1=0 vs. 0+0=0

사람, 부담, 그리고 소통

 위 두 가지 연산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것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수(數)의 차원에서 보면, 결과는 똑같이 ‘0’이다. 성적과 결과만으로 많은 '나'들이 평가받는 현대 사회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였고, 어떤 과정을 거쳐 ‘0’이 나왔는지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오히려, 그런 자신들의 행태를 당당해하고, 과정에 공들여 온 사람들의 시간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몹쓸 관습이 횡행한다. 생산적이지 못 한, 소위 ‘가성비’가 떨어지는 것에 왜 그리 집착하냐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런 취급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계산식은 내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나누고 싶을까?


 나는 끊임없이 사람에 대해,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강박적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틀어지기도 하고, 생각지 못 한 순간에 만족과 뿌듯함을 주는 공간, 그곳이 인간과 인간 사이다. 그래서, 관계는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논리나 상식, 가성비 같은 말로는 이해되지 않는 많은 요소들이 얽히고 설키는 정신적인 동시에 물리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두 가지 수식들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차이는 이렇게 관계가 지닌 비가시적인 성격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쯤 되면 이미 눈치채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숫자 1은 사람 사이에 오가는 뭔가다. 시간, 선물, 노력, 마음, 표현 등과 같은 것들. 내가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뭔가가 '1'이다. 그러면, 계산식 속의 0은? 말 그대로 오가는 것이, 나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연산기호 –(마이너스)는 뺀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내가 주거나 받은 것을 상대방에게 돌려준다는 뜻이 된다. 


 예를 들어, 친구가 감기에 걸려 내가 그에게 톡으로 안부를 묻는 마음의 표현이 1이라고 하자. 시간이 지나 친구가 회복이 되어 고마운 마음에 내게 커피를 한 잔 산다. 이또한 1이다. 나는 친구에게 1이라는 톡을, 친구는 다시 나에게 1이라는 커피를 서로 주고 받는다. 산술적으로는 하나씩 주고 받았으니 0이 된다. 그러면, 0+0=0은? 아픈 친구에게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음이 0이다. 아픈 친구가 회복되고 나서 나에게 굳이 뭔가를 해줄 이유는 없음이 0이다. 관계에서 서로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로 이 또한 0이다. 1-1=0과 0+0=0의 수식이 같은 결과를 갖고 있지만, 전혀 다른 프로세스를 갖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위의 두 가지 수식과 인간관계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최근에 내가 경험한 인간관계의 가장 희한한 특징은 ‘부담’이다. "부담드리는 것 같아서요.", "이거 좀 부담되는데..." 인간관계에 김영란법이 눈에 보이지 않게 적용되는가 보다. 3만 원도 아니고, 3만 원인지 아닌지도 구별할 수 없고, 심지어 물질적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1’(관심과 감사 등의 표현)이 부담된다고 못 받겠다는 사람이 주변에 참 많다. 


 무어가 그렇게 부담이 될까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게 1을 받는다. 1을 받은 사람은 그만큼의 1로 다시 돌려줘야 할 것은 정신적인 압박감, 또는 기분이 부담이란 걸까? ‘기브 앤 테이크’가 대인관계에 너무 깊숙이 뿌리 박힌 탓일까? 주면 그냥 받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걸까? 인간관계에서도 준 사람에게 되돌려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물건 살 때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 같은) 비지니스적인 룰 같은게 존재하나?  


 관계(關係)에 대해 국어사전은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 1)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음 2) 남녀가 서로 정을 통함 3) 남의 일에 참견함 4) 까닭이나 원인을 나타내는 말. 내 맘대로 정리해본다.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서로 정을 나누어 서로에게 참견할 수 있을 정도로 얽혀있는 상태' 정도가 되겠다. 어떤가? 주었다는 것은 반드시 다시 받아야 함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받았다는 이유로 그에 상응하는 가치(?)의 어떤 것을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관계 속에 얽힌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情)으로 서로의 삶에 (부정적인 뜻이 아닌) 관심이라는 차원에서 참견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다. 가수 송대관은 그의 메가 히트곡에서 이렇게 열창하지 않았던가? 


 "끈끈한 정 때문에 정~ 때문에 괴로~워~ 혼자 울고 있어요" 


 정은 끈끈하다. 끈질기기도 하다. 이별한 연인이 계속 생각나는 것은 사랑보다는 정 때문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다. 혼자 남아 눈물짓는 것은 그 정을 나눌 대상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친밀감을 느낄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connected에서 disconnected된 상태... X세대라 그런지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되는 것보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그 여파가 쓰나미급이다. 


 어떤 관계든 부담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때로는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의 차원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나누고 싶은 내 마음을 받쳐주지 못하는 현실적인 내 형편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의 차원이 될 때도 있다. 스트레스도 디스트레스와 유스트레스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관계에서 부담이란 것도 비슷하다고 본다. 인간관계란게 항상 좋은가? 아니면, 항상 부담스럽기만 할까? 아니다. 이 둘은 공생관계다. 부담은 이 둘 사이를 조율하며,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디스트레스의 모습을 띄기도 하고, 유스트레스의 얼굴을 하고 관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 부담의 두 가지 모습이 지금의 사회에서는 한쪽으로 크게 치우쳐 드러날 때가 많아졌다고 느낀다. 부담스러워서 다른 사람을 믿기 어렵고, 나아가서 함부로 믿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분명 실재한다. 일반화시키기는 뭐하지만, 너무 조심스럽고, 너무 부담을 가지는 바람에 사람이 사람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 하는 그런 풍광들을 자주 목격한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뭐가 그리 불안할까? 뭐가 그리 못 미더울까? 내 가족, 내 새끼, 내 물건... 그 외의 것들은 전부 경계하고, 실눈을 뜨고 쳐다본다. 그렇게 시작되는 관계들은 정이 끊어지면 너무 아픈, 그런 친밀감의 수준까지 이르기는 힘들다. 


 나 자신이 꼰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착각일 수도...^^;;),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나는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학교가 버스 종점에 있었다. 입학 때만 해도 종점에서 학교까지 2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했다. 길 가던 옆 논두렁에는 염소가 울었고, 시내가를 따라 걸어 다녔다. 학교가 그런 환경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못 해 본 것이 있다. ‘카풀’이다. 카풀을 아는가? 차가 있는 사람이 차가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차를 공유하는 문화다. 심지어, 잘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학교 게시판이나 아는 사람들을 통해 함께 카풀을 한다. 차를 얻어 타는 사람들은 차비 대신 기름값을 보태기도 하고, 간식을 사기도 한다. 그렇게 정(情)을 나눴다. 뻘쭘할 때도 많지만, 반대로 말이 통하고 잘 맞는다 싶으면 급격히 친해진다고 들었다. 이 90년대는(아.. 이 말을 쓰는데 내가 꼰대구나 싶은 확신이...ㅜㅜ) 지금과 뭐가 달랐길래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을 태워 줄 수 있고, 말도 트고, 간식도 사줄 수 있었을까? 뭐가 달랐을까? 이것을 연구(?)하면, 인간관계에서 1-1=0이 0+0=0보다 나은 이유가 명확히 밝혀질 것이라 확신한다.  


 관계에서 생기는 기브 앤 테이크 식의 부담이 관계 맺기를 가로막을수록 발전하는 것이 있고, 동시에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바로 카톡으로 대변되는 '텍스트 커뮤니케이션'과 전화로 대표되는 '음성 커뮤니케이션'이다. 부담 줄까봐 ‘내’가 ‘너’를 필요로 할 때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톡을 보낸다. 생동감을 살리고자 이모티콘도 날려본다. 해외에 사는 나의 인간관계가 버거운 것도 상당 부분 이 때문이다. 용기 내어 전화를 걸어본다. (일부러는 아니겠지만) 연결되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다. 꽤 자주 톡으로 답장이 온다. 전화가 아니라 말이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전화하셨어요?’ 이게 무슨 경우냐 말이다!! ): 그러면, 나는 실망하고, 위축된다. '아, 내가 부담을 줬구나. 다음부터 그러면 안 되겠다...' 이 경우는 수식을 어떻게 적용해야할까?^^;;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과 연결이 잘 안 되고, 돼도 반응이 시큰둥하면 괜히 다음부터는 웬지 모르게 내 마음을 나열기가 꺼려진다. 나 혼자 친해지고 싶어 안달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스스로가 초라해진다. 내게 부담을 느끼나 싶은 그런 느낌. 으윽.. 정말 싫다. 


 나의 인간관계 방식은 1-1=0인가, 0-0=0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수식의 것이 있다면 무엇이 될까 생각해본다. 내 것 하나를 나눠주고, 상대가 자신의 것으로 하나를 다시 나눠주면 결과적으로는 0이지만, 인간관계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될 수 있다. 부부 관계든, 부모-자식 관계든, 연인관계든, 친구관계든, 1-1=0은 아무것도 없는 ‘0’이 아니다.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0’이 아닌, α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누가 먼저 주고, 누가 나중에 주든, 주고받는 관계는 분명 서로 얽혀가는,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다. 부디 관계에서 받을 수도 있는 부담 또는 상처 때문에 말 그대로 안전빵(0)을 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담 없이 내가 안 주고, 안 받으면 서로 좋은 것 아니냐는 말로 자기 위안 삼고, 혼자 혹은 내 OO끼리만 있는 폐쇄적인 사람, 폐쇄적인 집단으로 죽어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란다...





20200420 15:06 - 20220701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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