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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l 08. 2022

도대체 누가 내 가면을 쓰고 있는가?

사람, 척, 그리고 소통

...But the things are changing now. Pretending is not just play. Pretending is imagined possibility. Pretending or acting is a very valuable life skill and we all do it. All the time, we don’t want to be caught doing it but nevertheless it’s part of the adaptations of our species. We change who we are to fit the exigencies of our time and not just strategically or to our own advantage sometimes sympathetically without our even knowing it for the betterment of the whole group.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어요. 척하는 것은 단순히 연기가 아니에요. 척한다는 건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에요. 척하는 것 혹은 연기를 한다는 것은 정말 유용한 삶의 기술이죠. 이미 우리 모두가 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도 척만 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인간으로서 우리가 삶에 적응하는 과정의 일부에요. 우리는 스스로를 바꿉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어려움에 잘 맞춰 살아가려고 말이죠. 그저 전략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내가 속한 사회가 더 나아지기 위한 변화인 것을 모르더라도, 마음이 가는대로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때때로 바꾸는 것입니다.”1) 


 20대 중반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부터 한 가지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싹을 틔운 고민은 오랜 시간을 거쳐 외국으로 나와 정서적 난민으로 지내는 2020년 현재(2022년 지금도 크게 달라진 바 없다ㅠㅠ), 드디어 화산처럼 내 안의 것들을 폭발시켜버렸다. 외로움을, 고립감을, 답답함을, 쓸쓸함을, 찔림을, 난감함을 퉤!하고 뱉어냈다. 많은 질문을 잿더미처럼 이곳저곳 남발해놓았다.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란 것이 있는가?’ ‘짝사랑은 40이 넘은 내 눈에 아직까지도 왜 이렇게 불쌍하게 느껴지는가?’ ‘누군가에게 꼭 인정받아야 하는가?’ 등등. 그 고민의 중심에서 존재감을 뿜뿜하는 한 글자. 


 척


 ‘척’해본 적 있는가? 없다면, 외계인이다. 단언한다. 나는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척할 때가 있다. 아놔 정말... 이놈의 인생. 아무도 없는데 왜 혼자 연극하고, 각본 고치고, 연기하다가, 결과를 상상하다가 끝내 혼자서 새드엔딩의 늪으로 빠져든다. 내가 고민했던 ‘척’은 그런 것이었다. 나쁜 것이었고, 비도덕적인 것이었다. 나의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오히려 척의 원래 본질과는 달리 복잡한 내 자신을 가릴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순수하지는 않으면서 순진한 사람인 것은 확실히 알려주는 표지판 역할을 했다. 찔려서 더 이상 ‘척’하며 살지 못 하겠다고 하면서도, 사람과 소통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나. 그런 복잡한 심정 속에서 살고 있는 내게 메릴 스트립의 연설 내용은 뒷통수를 한 대 빡!!! 그녀의 말이 옳고, 그름을 논할 생각은 없다. 그저 놀랍다. 


 '척'을 저렇게 볼 수도 있구나...


 척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필수적인 기술이고, 가능성을 의미한다... 는 그녀의 말. 솔직히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내가 오역을 한 것인가?^^;;). 어제도 했던 척을 나는 오늘도 했다. 나에 대해 뒷말을 전하는 사람에게 반가운 ‘척’ 인사해야 했다. 어떤 말이든지 해도 좋다는 사람에게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가 급격히 냉랭해지는 분위기를 경험하고 난 후, 괜찮지 않아진 내 모습에 대해 나는 아무 문제 없는 ‘척’ 했다. 친해지고 싶어 나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다음부터 그 상대가 나에게 거리를 둔다는 느낌을 받고 나서는, 그 사람을 만나도 마냥 별일 없는 '척' 했다. 솔직하면 손해 보는 세상인가? 가감없이 내 자신을 드러내면 등신 취급 받는 세상인가? 아니면, 내가 그런 사람들만 만난 것일까?(세번째라고 믿고 싶다ㅎㅎ) 나는 마냥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면 가슴 속이 꺼끌거릴 뿐이다. 좋은 것은 정말 좋다고, 사랑하다고, 쏘~ 어메이징! 하다고 감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다. 하지만, 적어도 경험한 사람들 중 상당수에게 그런 나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 했다. 내가 받은 느낌이 그랬다. 그 영향으로 그렇게 나는 주눅 든 인간으로 살아오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나는 ‘척’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기분으로 살아왔다. 나랑은 안 맞아 뭐 그런 것... 


 메릴 스트립의 말 속에는 내가 나를 고결한 사람인 것처럼, 세상에서 제일 순진한 사람인 것처럼,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고통 가운데 살아온 성인인 것처럼 여겨온 나 자신을 직시하게 하는 낯선 설득력이 있다. 삶의 적응방식이고, 유용한 기술이며, 무엇보다도 나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 이 내용들이 사람 사이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든 ‘척’해도 좋다는 면죄부를 발행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진즉에 내가 이미 ‘척’하고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별 놀랍지도 않은) 사실일 뿐이다. 신기하게도, 어떤 경우에는 나의 ‘척’ 기술이 무의식적으로 허용되고, 별거 아닌데 ‘유용한 기술’이었던 반면에, 또 다른 경우에는 나의 양심을 찌르고,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수준의 자책감으로 몰고 가는 '악마적인 무언가' 이기도했다. 어떤 경우였을까? ‘척’은 도대체 내게 언제 유용하고(valuable), 언제 악마적(demonic)이었을까? 혹시 나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내가 가진 윤리나 가치 판단척도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갖다붙였었나? 그렇다면, 그 자체로 이미 나는 내 삶에 악마적인 역할을 해온 것인데... 뿐만 아니라, 내 귀의 코걸이와 코의 귀걸이에 당한 수많은 내 지인들에게도 그렇게 다가갔을지도... 


 인간관계에서 남만 탓하는 순간을 지나, 나만 책망하는 단계를 거쳐, 내가 너를 대해왔던 ‘사고방식’과 ‘태도’를 돌아봐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단순하고, 일방적이고, 자기(에게만)연민적이며, 인간으로서의 ‘적응’을 간과한 결과로서의 (허울 좋은) ‘양심의 가책’에 허덕이며, 그렇게 형성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여지껏 만난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가해자 취급한 반면, 정작 나 스스로는 '척' 뒤에 숨어 살아온 것은 아닐까? 오늘밤 ‘척’하며 살아온 내 자신에 뒷통수를 맞는다. 


 잠들기 전까지 내 기분은 백지가 될까, 낙서장이 될까... 궁금해지는 밤이다. 


20200418 22:28 - 20220708 23:04


1) https://www.youtube.com/watch?v=GAcx1TYqqJo, "극찬받은 인생 졸업 연설" <메릴 스트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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