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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n 26. 2022

행님아, 그 길을 건너지 마오

사람, 가족 1, 그리고 소통

비가 기분 나쁘게 주룩주룩 오던 그날. 기분 나쁜 비 따위 비교조차 안 될 눈빛. 평생 잊지 못 할 그 눈빛이 횡단보도 중간쯤까지 쫓아간 나에게 말했다. 


 더 따라오면 진짜 죽는다.

 이제는 20년이 넘은 이 장면은 지금도 오싹하다. 동시에 내 인생에서 가족이라는 카테고리가 습하고 거무죽죽하며 검은데 뿌연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나의 형은 그때 그 횡단보도를 건너고는 한동안 실종(?)됐었다. 아버지였는지, 형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은, 둘 중 하나는 맨발로 뛰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다. 형과 6살 차이가 났던 나는 그 당시 완전 쫄보였다. 20대 초반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그때 나를 그렇게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마 60이 되고, 팔순이 되어도 그때 20살 즈음의 나는 오줌만 안 쌌지 완전 어린아이로 기억될 것이다. 횡단보도 중간에서 들었던 그 말과, 마주쳤던 그 눈빛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그 앞뒤로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저 그 후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형을 쫓던 아버지의 머리는 하얗다 못 해 은발이 되어버렸고, 울고불고 하던 엄마는 쪼그라들었다. 만약에, 혹시 내가 횡단보도를 지나 계속 따라갔더라면 형이 나를 해코지 했을까? 이 부분은 확신한다. 좀 더 정확히는, 이것만은 지켜주고 싶다. 그건... 형은 절대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우여곡절 끝에 형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가 지금까지 형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인생 후반부의 이미지다. 


“생각해보는 중이다.”

“다음에 말해주께.”

“내가 알아서 한다. 쫌!”


 대화를 해보려고 해도 짜증으로 끝나게 만드는 절묘한 화법. 브라질과 한국이 축구하는 걸 보면 볼수록 브라질을 이기기 위해 추격하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음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형의 이 말들은 내가 어떤 말도 거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형은 지나가다 멀쩡한 남의 차를 깨부쉈다. 핸드폰 신형이 나올 때마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폰을 바꿨다. 경찰서에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유난히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로 출몰했다.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도시들이지만, 형이라는 한 글자가 끼는 순간, 부산과 포항은 나를 찔끔하게 만든다. 20대 중후반 학업과 직장을 이유로 본가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던 나는 종종 들려오는 소식에 몸서리쳤다. 또 몇 백이 날아갔느니, 병원에 강제입원을 시켰는데 살이 불대로 불어서 건강이 위험하다느니... 


 어릴 적 밤이면 엄마아빠 몰래 방에 모여 지금은 사라진 큰 유리병 콜라와 홈런볼, 새우깡 같은 것들을 사서 주말의 명화와 토요명화를 지지고 볶으며 함께 봤던 형이었다. 몸이 약한 나에 비해 형은 아버지 유전자를 물려받아 건강하고 힘도 셌다. 내가 아플 때면 나를 엎고 병원을 갔던 사람도 형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아침 마다 늦잠 자던 나를 학교까지 태워다줬던 사람도 형이었다. 그런 형이 그렇게 내 인생에서 지워졌다. 횡단보도를 건너간 이후로... 


 무엇이 형을 그렇게 막 살게 만들었을까? 정말 오랜 시간 나에 대해서만큼 고민했다. 가족이니까. 내 형이니까. 그런데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잃어버린 형을 찾고 싶었다. 스스로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형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도 싶었다. 소용없었다. 형은 20년 넘는 시간 동안 생각 중이어왔고, 언제나 다음에 말해준다고 했으며, 알아서 할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해외에서 파트타임으로 살고 있고, 팔순이 다 된 아버지는 지금도 육체노동을 하신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 했던가? 60이 넘어 시작한 엄마의 자아찾기 운동은 70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평생 장사만 하던 양반이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발견하였으니 그 희열이야 오죽할까? 태극기 부대 지역구 대표수준의 확신과 열정으로 너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 것 같아 걱정이 크다. 이런 가족을 둔 형은, 아니 앞서 설명한 형을 둔 나의 가족은 오늘 하루도 답답한 시간을 보낸다. 틀림없다. 부모님은 여전히 형의 결혼에 희망을 걸고 있을까? 6살이나 많은 형은 있는데 여전히 삼촌은 아닌 나는 아직도 조카에 미련을 두고 있는가? 5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헬스장 가는 것 외에는 어떤 사회생활도 하지 않아 보이는 형은 뭐가 재밌고, 어떤 미래를 그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20년이 넘도록 지겹게 들어온 ‘다음에’ 말해준다는 그 말은 도대체 어떤 말이며, 그 말은 정말 존재할까? 80을 향해 가는 노부모의 심정에 이미 박힌 큰 대못을 알게 모르게 더 꾹꾹 누르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인식이나 하고 있을까? 


 내가 왜 이렇게까지 디테일을 얘기하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신상이 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불현 듯 올라온다. 그런데... 얘기할 곳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한 사람은 내 아내 뿐이다. 어디 대놓고 얘기하기도 민망할 뿐만 아니라 이 얘기를 들은 그 누구도 난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뻔하다. 그 뻔한 상황에 한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니 내게 남는 것은 형의 동생으로, 노부모의 막내아들로서 느끼는 체한 마음과 중압감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남은 인생 내내 저렇게 살 것인가 하는 절망감은 나만의 몫인가? 저 인생은 저러려고 태어났을까 하는 아주 원초적이고 쓸데없는 질문만이 계속 맴돈다. 


 가족만큼 내 맘대로 안 되는 존재들은 없는 것 같다. 아마 내 맘대로 안 되는 최상위 포식자(?)들이다. 게다가 쉽게 끊을 수도 없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대상들도 아니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사람들... 딱 떨어지는 노랫말이다. 보증을 서서 집구석을 말아 먹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인생을 포기한 체 살아가며 다른 가족들의 인생도 시궁창으로 밀어 넣었다. 사회적으로 엄청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닌데, 그 횡단보도 이후로 가족들 마음에 큰 돌덩어리를 얹어놓은 죄인이 되었다. 진심으로 죽이고 싶을 때도 있었고, 정말 불쌍해서 나 혼자 엉엉 울었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형 하나로 인해 그분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자책하며, 그 열심히 살아온 나날들을 부정하려고 하는 모습들은 나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게 만들기도 한다. 


 요 몇 년 동안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싶었다. 코로나 때문에,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영상 통화 외에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웬만해서는 다 큰 형제들끼리 살갑게 영통하고 그러지는 않으니까. 안 보니까 좀 낫더라. 눈앞에 안 보이고 귀에 안 들리니까 나는 좀 살만하더라. 나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힘이 다 빠지신 아버지의 물기 젖은 목소리와 땅 끝까지 들어갈 듯한 한숨을 들을 때면 나는 자동적으로 스스로를 자책한다. 내가 과연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있어도 되는가? 부모님에게 저리 무거운 짐을 떠다 넘기고 나 살자고 이러고 있어도 되는가? 이래나 저래나 가족인 것은 변함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 스트레스는 덜 받지만, 오히려 확인할 수 없는 형의 많은 모습들을 상상하게 되어 더 무겁다. 그러니 아버지와 엄마가 이고 지는 무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보다 훨씬 더 심한 경우를 지나온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무게를 지나고 있는 누군가의 가족이 있겠지. 어떻게 견디고 살까? 물어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위로도 받고 싶다. 하지만 어떤 말이 내게 해결책으로 와닿을 것이며, 어떤 마음이 내게 위로를 전달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뒤이어 찾아온다. 나의 가벼운 감기가 다른 사람의 무거운 독감보다 더 심각하다고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고 믿는 나라서 이런 데서는 더 회의적으로 변한다. 문득 이 나라 와서 하늘과 구름을 자주 쳐다보는 버릇이 생긴 건, 땅에서는 대책이 보이지 않아서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본다. 


 형... 그때 횡단보도를 그렇게 건널 일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삼촌이 되었을까? 부모님이랑 형수님 모시고 여행도 가고 맛집도 가고 그랬을까? 각자 열 받는 일로 서로의 고민거리를 씹어주며 나이 먹은 형제의 우애 있는 모습으로 꽤 괜찮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절대 듣지 못 할 답을 가진 질문들에 또 거지같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형이란게, 가족이란게, 마냥 이렇지만은 않을텐데... 


 오늘도 나는 답 없는 물음에 한참을 혼자 주절거릴 뿐이다. 





2022062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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