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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n 25. 2022

한 장의 프린트, 6개의 칸

사람, 고마움, 그리고 소통

 2주 전 인터넷 제공 업체를 새로운 곳으로 바꿨다. 자연스레 집안에 쓰고 있던 기존 와이어리스를 새로 세팅하게 되었다. 새로운 네트워크 이름, 새로운 비밀 번호. 자주 쓰는 노트북과 데스크탑, 모바일, 태블릿까지 모조리 세팅하고 며칠 째 잘 사용해오던 그때. 아내가 볼멘 소리를 한다. 


"프린트가 왜 안 되지?!"


 아내는 몇 달 전부터 그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베이킹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식빵, 마카롱, 휘낭 머시기 까지... 나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을 덕분에 실컷 먹어보는 호사를 누렸다. 그런 와중에 나름대로 해온 시행착오들을 바로 잡아가며 레시피들을 정리해 프린트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차. 보통 1주일에 한 번 밖에 쓰지 않는 프린터라 미처 거기까지는 세팅할 생각을 못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가 나보다 훨씬 더 컴퓨터를 잘 하니까 당연히 잘 처리하겠지 싶어 그냥 듣고 말아버렸다. 그 후로 별 말이 없길래 잘 처리됐나 보네 하는 생각을 하며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 프린터를 쓰는 토요일 바로 지금. 프린트를 하려고 하는 순간 뭐야 왜 안 돼? 하는 생각과 거의 동시에, 


'아... 아내가 프린터를 못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시리 미안하고 한 번이라도 들여다 볼 걸 그랬나 싶은 마음에 아내의 볼멘소리가 이내 마음에 다시 떠오른다. 그럼 내가 하는 수밖에. 프린터의 네트워크를 다시 잡고, 비번을 입력하고, 설정 OK를 누른 후 30여초 정도 지나니 세팅이 다 되었단다. 그런데, 갑자기 윙~~ 철컥! 


'뭐지? 나는 아직 프린트한게 없는데?' 


그리고 한 장의 A4 용지가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튀어나온다. 6개의 칸.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식재료와 그것들을 어떤 중량과 어떤 순서에 따라 조리 할지 나름의 설명들로 촘촘히 채워져있었다.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왜 프린트 한 장에 그려진 6개의 칸을 보고 마음이 찡해지지? 뭐지 이건?' 


 몇 달 전부터 베이킹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시도했던 아내는 요즘들어 말이 많아졌다. 잔소리나 불평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칼이 들어있고, 어떤 사람의 말에는 꽃이 들어있다. 요 며칠 자신이 만든 베이킹 작품들에 대해 어쩌면 무관심하게 듣고 있던 내게 설명하는 아내의 말에는 꽃이 들어있었다. 솔직히 내용은 하나도 이해 안 되고, 기억도 안 난다. 그런데 아내의 말에 담긴 즐거움과 희열과 열정은 그 느낌 그대로 내게 전달이 되었다. 꽃이 든 말이었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 기분이 좋은 뭔가를 발견하고 그것에 시간을 들이고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다시 요리조리 해보는 아내의 모습.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남편에게 말해주는 아내의 모습. 마치 초등학생이 자기가 평소 절실히 원했던 선물을 받게 되어 친구에게 신나고 들떠서 정신없이 말해주는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2백만 원이 채 안 되는 월급으로 서울에서 네 식구가 살기 힘들어 미련없이 다 정리하고 이곳으로 온지 6년차다. 초반 3년은 종종 고깃국을 먹었을 뿐, 고기다운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5살 아들과 2살 딸이 제법을 크게 넘어서서 잘 먹던 시기였다. 지금도 감사하게 잘 먹는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 고기는 아니지만 늘 부지런함과 정성을 다한 음식으로 먹이고 케어한 사람이 아내다. 성격이 무던하고, 심성이 건강한 점이 큰 매력인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마른 체형에 일단 시작한 일은 쓰러질 때까지 일단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 지난 6년의 시간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힘들면 힘들다, 지치면 지친다고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중인(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남편’ 나와는 달리, 곧 죽을 것 같아도 묵묵히 자기 일에는 끝장을 보는 아내다. 늘 고맙지만, 그 모습이 짠했었다. 아마 부모와도, 친구들과도 떨어져 지내는 아내가 이 먼곳까지 와서 변변한 직장 하나 없는 남편과 함께 사는 모습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던 내게 새로운 네트워크 변경 때문에 깜빡하고 세팅을 못 했던 프린터가 새삼 그 고마움을 배가시켜준다. 한 장의 프린트와 6개의 칸. 깐깐한 나와 어린 아이들 보살피느라 고단했을 그 마음에 생수처럼 즐거움을 가져다준 일을 찾아 생기가 도는 그 모습에 고맙다. 나도 나름 외노자로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외노자를 믿고 함께 하며 옆에는 아들 딸 하나씩 보듬고는 그 또한 자기 삶이라 담백하게 말하며 씩씩하게 걸어와 준 그 걸음에 고맙다. 즐거워서 하는 것이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여러 가지 시행착오 속에서도 좀 더 나은 길을 향해 도전하는 그 모습에 내가 용기를 내야겠구나 라는 마음을 들게 하니 또 고맙다. 이러려고 시작한 글이 아닌데 어느 덧 고백록이 되어있으니 이 또한 고맙고, 심히 민망하다^^;; 


 즐거워하는 당신의 소녀 같은 수다가 마냥 좋아보이네. 메마른 광야를 지나오다가 남은 광야를 힘내서 갈 수 있게 할 오아시스를 마주한 것 같아 보여. 그런 당신을 보며 나 또한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가장 고맙네^^


2022062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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