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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n 24. 2022

왜 why인가?

사람, 불확실성, 그리고 소통

Why? is a question only God can answer, but nonetheless we waste enormous emotional energy dissecting it.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두가 힘겹다. 은행잔고는 가볍다. 공과금은 버겁다. 우리 마음은 무겁다. 지금이 그런 시대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이 생기는거지? 라는 생각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실업율의 폭발적 증가, 정신건강의 적신호,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비롯된 관계적 문제 등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만큼 많은, 그리고 다양한 문제들이 매시간 쏟아진다. 가끔씩 그런 관련 뉴스들을 본다. 그 중에 한 칼럼니스트가 언급한 위의 문장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왜?' 라는 질문은 신만이 답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질문을 들이파며, 정신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이야... 팩폭이 이런 건가. 냉정하다 못 해, 마치 이 양반은 코로나가 덮친 이 지구상이 아닌, 우주 밖에서 이 푸른 우주가 겪는 검붉은 현실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휘갈기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더 열폭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말이다... 이 말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도대체 제 정신이냐? 지금 주변 상황과 사람들 꼬라지를 보라! 굳이 그런 말을 해야하나? 라는 말이 안 터져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말들이다. 왜? 인정할 수 밖에 없으니까... 너무 냉정하지만, '왜?'가 던지는 질문들을 잘 살펴보면, 그제서야 나는 차분해진다. 그렇게 나도 그 냉정함에 전염된다. 현실을 직시하고, 붕 떠있던 내 마음을, 열이 받쳐 있던 내 상태를, 끓는 물에 찬물을 부어 미지근하게 만들 듯 밸런스가 맞아들어간다.  


 나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소통에 관심이 많다. 글도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다룬다. 어떤 사람이 뭔가에 대해 글로 표현한다면, 좋든, 나쁘든, 그것에 대한 그이의 관심이 지대해진 결과물, 그리고 계속되는 질의응답의 표현일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렇다. 그런 나는 사람에 대해 언제나 왜?를 붙여왔다. 그런데, 30대 후반이 지나며 갑작스레 깨닫게 된 것이 저 양반이 말한 것과 통한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이 관계에 대해, 이렇게 왜?를 외쳐본들 답은 누가 해주지? 그게 답이라고 할 수 있나? 물론, 어떤 왜?도 그것이 주는 깨달음과 배움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를 묻는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answer은 없다(서글퍼진다ㅜㅜ). 그저 solution 정도를 얻게 될 뿐이다. 우리는 이 왜?에 대한 답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 질문 앞에 벌거벗은 체 서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솔루션들로 하루하루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우리 사람이다. 저 칼럼니스트 말대로라면, 왜?의 정답은 신만이 알고 있으니까.  


 흥미로운(?) 것 한 가지는, 대부분의 경우 행복하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왜?를 던지지 않는다. 배우 성동일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생아로 자란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는 피자 먹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가격 걱정 없이 시키라고 할 수 있을 때라고 답했다. 무명 시절이 길었던 그가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이 불러온 정서 때문에, 그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제는 마음 편하게 아비다움(?)에 흠뻑 취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뿌듯할지 나도 느낄 수 있다. 그런 그가 피자 가격에 상관없이 주문하라는 말에 아빠 쵝오!를 외치며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 집은 왜 행복한거야?'라는 질문을 떠올릴까?  


 왜?에는 열의에 찬 문제해결의식과 간절함이 담긴 경우가 있는 반면,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고 싶은 불평으로 일관된 때도 있다. 성동일 배우가 행복에 왜를 붙이지 않는 것은 아이들이 먹고 싶은 피자를 먹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고, 불평이 터져나올만큼 부정하고 싶은 상황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는 ‘닥행’이다. 닥치고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좋은 데, 잘 지내는데, 따지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 누리면 된다. 하지만, 거슬리고, 불편한 사람과의 문제에 대해서는 왜‘를 남발한다. 왜? 일까? 관계를 좋게 하고 싶은데서 비롯되는 간절함의 표현일까? 아니면 관계가 이 지경이 된 것에 대한 책임은 내게 없다는 발뺌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 순간 자문해본다. 내가 왜?를 외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인가? 불평하고 싶어서인가? 


 현재 내가 가진 왜? 가 불평과 발뺌과 회피를 깔고 있다면, 이제 곧 지독한 악순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끊임없는 why의 저주라고나 할까... 그러면, 어떤 태세 전환이 악순환을 막을까? 지독하게 진부한 대답이 머리에 떠오른다. 감사와 믿음. 내 지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악’에 대한 불평과 책임회피는 계속 고만고만한 류類를 낳을 뿐이다. 그러니, 왜의 주체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고만고만한 ‘왜’를 넘을 수 있는 답이라면 답이 되겠다. 꼴보기 싫은 사람 앞에서 도끼눈을 치켜 떴었다면, 이제 가볍게 인사 한 번 할 수 있을 정도,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외축됐었다면 이제 끝까지 눈마주칠 수 있을 정도 할 수 있다면, 그게 인간 승리!!!다. 어차피 인생에서 단번에 바뀌는 뭔가는 없다. 그저 바로 이 다음 단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 다가올 작은 변화는 무엇일까? 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왜’에 대해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덜 파괴적인 자세가 아닐까? 


 지금 ‘why’를 품고 있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선택을 품을 것인가?  


20200418 -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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