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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rocosm Jul 01. 2023

완벽한 어느 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정지돈

아이가 2박 3일 수련활동을 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이었다. 코로나 이전이면 이미 몇 번을 하고도 남았을 활동들이 시작되었다. 야영이나 수학여행이 나의 독립심을 키운 것이 분명하기에 이 소식이 너무나 반가웠다. 친구들과 방을 정하고, 짐을 싸고, 출발하는 날 아침에 캐리어 끌고 만나서 종알종알 학교 가는 걸 보면서 설렘을 느꼈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리고 나도, 얼마나 재밌고 자유로울까.


아이가 출발한 첫날에는 여러 가지 행정적인 일들을 결정짓고 쑥대밭이 된 집을 조금 정리했다.

둘째 날은 작정을 하고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절대 자유를 즐기리라.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경복궁역 앞 골목 에스프레소바에서 에스프레소와 에그타르트 콤보세트를 4,000원에 먹으며, 이런 곳이 우리 동네에는 왜 없는가 생각했다. 네이버지도에 별표해 두었던 근처 가게들을 포인트 삼아 골목골목 산책을 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중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러 친구들이 골목 구석구석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현장학습을 온 것인가 잠시 생각했다. 계속 걸었다. 너무 걷다 보니 혼자 밥 먹기 싫어져서 을지로에서 일하는 J에게 연락을 했다. 을지로4가까지 걸어가서 이름 없는 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칼국수에 뭐 특별한 것도 없었는데, 너무나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J와 함께 커피 한잔 마시며 지나가는 을지로 직장인들을 보는데, 옛날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점심 먹으러 나오면 이미 너무 뜨겁고 덥고 졸린 태양이 비추는 게 싫었던 기억이 났다. 뭔가 지루한, 아침의 상쾌한 햇빛과 너무 다른 졸린 느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직장인인 J를 다시 회사로 보냈다. 밥을 먹고 기운이 나서 갈까 말까 망설이던 홍대 연남동에 가기로 했다. 홍대 유명한 가게들은 왜 오후 1시 이후에 문을 여는 것일까. 홍대입구역에서 나와 경의선숲길을 따라 쭉 걸었다. 정말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길을 잘 만든 데다, 이날도 여러 작업자분들이 나와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유현준 교수의 걷고 싶은 길로서의 공원과 벤치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곳에 산다면 어떤 모양의 삶을 살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걷고 걸어 이 길의 끝에 있는 서점에 도착했다. 어떤 책이든 한 권을 사겠노라 생각하고 갔는데, 이곳의 큐레이션이 너무 딱 나였다. 내가 이미 읽었거나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책들이 잘 보이는 곳에 여럿 진열되어 있었다. 또 한참을 걸어야 하기에 두꺼운 책들을 여러 권 살 수 없어서 얇은 책들을 이것저것 들춰보았다. 그러다가 제목이 너무나 맘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정지돈>. 책을 촤라락 훑어보는데, 또 이런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 글은 언젠가 소설이 될 것이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의 책이라면 사야지 하는 마음으로 계산을 했다. 서점의 뒷길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 카페에 도착해서 커스터드푸딩과 얼그레이 냉침차를 주문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낯선 학술 단어와 외국어 이름들이 많이 나와서 처음에는 기억하고 연결하면서 읽다가 도중에 뭔가 이건 아니다 느끼고, 뇌를 놓고 읽기 시작했다. 의미를 단어마다 따지지 않고, 흐름으로 읽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이런 식의 읽기는 처음이었다. 전형적인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주제도 아니고, 끝날 것 같은 문장에 또 이어지는 문장에 문장. 그런데, 재밌었다. 그냥 누군가의 생각의 흐름을 오래된 브라운관 화면으로 보는 것 같달까. 막상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진 않는 소중한 생각의 파편들 같기도 하고. 앞의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뒤에 나오는데, 그것도 명확함과 명확하지 않음 사이 어딘가에 있고. 어떤 전시회를 보고 나온 느낌이기도 하면서, 누군가의 또는 내 머릿속 같은 느낌도 들었다. 흥미로운 책이었다. 그러면서 오늘 나의 시공간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어딜 가야지 하고 나온 건 아니지만, 계속 걷고 또 걷고. 걸음걸음에 계속 교차되는 공간과 시간과 시선과 이미지들.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다시 길을 걸어 홍대입구역으로 가는데, J가 명동에서 저녁을 먹자고 하여 다시 을지로입구로 갔다. 시간이 조금 남아 명동성당에서 J를 기다렸다. 저녁으로 떡볶이와 만두, 쫄면, 김밥을 배부르게 먹고 직장인들과 함께 퇴근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하루종일 23,000보 이상 걸었다.

셋째 날은 아이가 돌아오는 날인데 그래도 집은 깨끗해야지 하며 구석구석 청소하고, 특별히 아이 침구도 다 빨고 정리했다. 그런데 아이는 집에 오면서 친구 여섯 명을 데리고 왔다. 다 끝나버린 수련활동과 내일 학교 학원 스케줄 사이의 완충지대가 필요한 영혼들이었다.


집에 오기 싫었다는 아이. 너무나 이해가 가는 데다 커가면서 필요한 마음이라 그 말이 반가웠다. 나도 그랬지, 수련회 같은 거 끝나고 그 여운에 집에 가기 싫었지. 많이 컸구나. 그렇게 커서 독립하는 거지. 며칠 동안 나도 혼자 잘 놀고, 아이도 잘 놀고.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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