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랑시에르와 로댕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13장을 읽고
「표면의 탐험가 오귀스트 로댕」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보면서 바다의 물결이 떠올랐다. 글의 처음을 바다로 시작해 본다. 바다의 물결들은 어떤 날엔 단단한 바위 표면처럼 정말 조각으로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바위와 달리 바다는 실제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빛을 받아 빛나는 물결들은 릴케가 말하는 “빛과 사물의 만남”으로서의 “표면”이 된다.(460쪽) 로댕의 표면과 바다의 물결은 둘 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을 가지며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끊임없는 움직임
로댕의 표면에는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 행위”인 유동적인 표면들이 있다.(461쪽) 바다 역시 마찬가지다. 바다는 움직임 그 자체이다. 잔잔할 때도 거친 파도가 칠 때도 그것을 드러내는 움직이고 변화하는 물결이 있다. 로댕의 표면도 그렇다. 물리적으로는 고정된 조각이지만 표면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생각하는 사람>의 몸은 피부 속 골격과 웅크린 몸의 이유를 생각하게 한다. 상징과 의미가 완결된 로댕 이전의 조각과 달리 로댕의 조각 속 신체들은 그 자체로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쓰고 표현”하는 역동적인 조각이다.(467쪽)
표면, 외면과 내면의 만남
로댕 조각의 표면은 외면이기도 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이 표면은 내면의 감정과 사유를 드러낸다. <지옥의 문>에서 단테의 특정한 서사 속에서 형상화된 인물들은 그것들의 “실재(reality)에 충분히 근접하기 위해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단면들로 묘사하여 희망, 상실, 고통, 체념 등의 몸짓과 정서로 다시 태어났다.”(464쪽) 때문에 로댕의 표면은 외면이며 동시에 내면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생성의 이념”이라고 했다.(474쪽) 표면이 외면과 내면을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고 볼 수 있겠다. 바다의 물결 역시 겉으로는 물의 흐름이지만 이 물결이라는 표면 아래에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움직임이 있다. 이 깊이를 내면이라 할 때, 물결은 바다의 내면 즉 깊이를 드러낸다. 바닷속 어떤 힘이라도 물결은 그것을 드러낸다. 로댕의 ‘표면’과 바다의 물결은 둘 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겉과 속이 연결되어 상호작용한다.
로댕의 모더니티
그럼 로댕은 어떤 것을 새롭게 저항하고 지향했을까? 로댕의 조각에서 표면은 로댕의 “걷고 있는 손”, “잠자고 있는 손”(467쪽)처럼 고정된 기능이 없다. 로댕 이전의 조각을 생각해 본다. 미켈란젤로도 제작했던 <다비드>의 손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앞둔 다윗(다비드)의 용기를 상징한다.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황홀>에서도 천사의 손이 나온다. 이들은 단지 종교의 한 장면으로 기능한다. 로댕의 손은 이런 기능을 거부하고 그저 손 자체로 존재하며 “손들의 고유한 이야기를 쓰고 표현”한다.(467쪽)
로댕 조각에서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인간이다. 신화나 종교나 이념에 봉사하는 인간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의 인간이며 피가 흐르고 살아있어 감정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다. 이것이 로댕의 새로움 중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지옥의 문>은 부분을 파편적으로 구성하여 오히려 우리가 부분과 전체를 오가며 볼 수 있게 (정신없어 보이게) 제작했다. 지옥은 사실 정신없는 곳이 아닌가? 랑시에르는 플로베르의 작품을 예로 들며 “로댕의 새로움은 그 운동과 삶을 표현하는 방식 혹은 문체(style)에 있었다”고 말한다.(464쪽)
로댕의 인간, 몸, 마음
랑시에르는 로댕의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로댕의 <지옥의 문>이나 <칼레의 시민들>은 근대적 인민, 자유와 평등의 존재인 근대적 민주주의 대중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과 구별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학과 정치, 예술과 삶이 맺는 관계는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랑시에르가 로댕에게서 발견한 예술의 정치성은 종종 근대의 윤리적 이념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박애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고유성을 갖는다.”(482-483쪽) 로댕의 인간은 근대적 대중으로서의 인간이다. 그런데 박애라는 말을 보편적 개념으로 본다면 로댕은 그 보편성에도 묶이지 않는 인간 개인의 존재, 고립된 인간으로서의 개인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닐까? 박애주의나 그 어떤 보편성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고유한 ‘인간’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저 고립되기만 할까?
<생각하는 사람>을 본다. 지옥을 보는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웅크린 ‘몸’에서 마음을 느낀다. 굶주리다 자식의 살을 뜯어먹은 우골리노의 ‘몸’을 본다. 매일 나오는 잔혹한 뉴스를 생각한다. 곧 달아나는 사랑이 될 키스하는 연인을 본다. 저 위에서 세 번이나 반복된 망령을 본다. 그 아래에 앉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본다. 지옥의 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연민을 느낀다면 인간은 고립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옥이라는 종교적인 공간에서 아비규환의 이교적인 몸들, 그래서 그것이 원죄인 인간의 몸과 마음을 본다.(끝)
참고도서
서동욱 엮음,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문학과지성사, 2014
베르나르 샹피뇔르 지음, 김숙 옮김 『로댕』, 시공사, 2003
* 로댕의 드로잉은 참 좋다. 대학시절 가벼운 느낌의 로댕의 인체드로잉을 보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지역도서관에서 수강했던 12주간의 미술강좌가 이 챕터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아쉽고 감사한 마음이다.
* 대학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친한 친구가 2학년때 사고로 곁을 영원히 떠났었다. 그 애랑 로댕에 대해서 얘기했나 안했나 지금 분명히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도 얘기하지 않았을까? 그애의 그림이 로댕의 드로잉 같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 점을 난 꼭 알려줬을 것이다. 조소 전공이었던 그 애와 함게 우린 판화도 같이 하고, 목탄 소묘도 같이 하고... 매일 순두부찌개도, 술도 같이 먹었다. 난 그 애를 따라 머리도 커트했다. 자소상 만든걸 학교 어디다 숨겨두고 잊었고... 그 사실을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하며 웃고. 전공 말고 다른 곳에 마음이 팔린 나를 놀리진 않았지만 어땠으려나. 이런 저런 미감, 추감, 농담, 시덥잖은 것들을 킥킥대며 터미널까지 걸었고, 다행히 서로 공감하는 것이 많았지. 내일 또 보리라 아쉬워하며 인사하고 각자의 집으로. 그땐 참, 어리고 그나마 솜털 남아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