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카 이(ANICKA YI) 전시 를 보고.
1. '달빛 어린 산호가지'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올린다’
(Each Branch of Coral Holds Up The Light Of The Moon, 2024)
마치 ‘뜰앞의 잣나무’ 같은 선문답처럼 여겨지기도 해서, 이 영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편안하게 싱잉볼 소리를 음미했다. 이 글은 이 영상과 전시 전반의 후각, 냄새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생명체다. 우주 어딘가에서 생겨나 느낌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생명이다.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생명으로부터 생겨나와 잠시 있다 소멸한다.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 파장과 기운은 아마도 다른 생명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은 또 어딘가에서 영상의 꼬물이는 움직임처럼 살아있지 않을까?
영상 자체가 노래하듯 연주되는 것 같았다. 거기서 움직이는 것들은 어떤 흐름으로 만나기도 하고 분열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마구 변하기도 했다. 어쨌든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 세계처럼. 내 몸의 세포 분열이나 자연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변하고 움직이며 잠시도 정지해 있지 않은 이 세계를 말 그대로 물질화하면 이런 움직임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곳에는 미와 추, 선악과 같은 개념은 없을 것이다. 개념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지금도 있고, 내가 가늠하지 못하는 시공간에서 여전히 움직이며 살아있는 생명력이라면 말이다.
그것은 텅 빈 상태로 가득 차 있는 원자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텅 빈 공간의 움직임 같은 것 말이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어도 발견하게 될 미시적이지만 크게 비어있는 움직임일 것이다. 서로 끈처럼 엮인체 허공 그 자체인 활발한 어떤 움직임처럼. 그래서 조금 더 비약하자면, 비어있음으로 가득 찬 물질세계에서 물질인 너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도 크게 하나이고 고양이나 구름도 하나다. 그렇다면 온통 하나인 우주이며 나는 ‘뜰앞의 잣나무’나, ‘달빛 어린 산호 가지’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생성된 데이터들이 작가 사후에도 알고리즘으로 생성되어 삶을(?) 계속한다고 한다. 사실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움직임이 내일의 움직임을 만드는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진화론이며 불교에서의 윤회이다. 오늘의 업은 과거의 나의 업의 결과이며 내일의 그것을 만든다. 우리의 세계는 저마다의 알고리즘으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속에서 항상 움직이는 것들은 아름답다.
(자료 : Gladstone Gallery)
2. 향기
커튼이 쳐진 입구에서부터 났던 향은 나는 그냥 어떤 냄새가 있나부다 했는데 그것도 작품이었다. 작품 캡션을 보지 않았으면 그저 환기가 안되는 어떤 냄새라고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냄새라고 지나쳐 버리다니, 냄새 자체가 작품이었는데. 후각은 우리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우리에게 침투되어 있다. 지나치고 나중에 알았어도, 모르고 지나갔어도,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곳의 공기를 호흡했을 테니 두 눈을 감을 수도 없고 귀를 막아도 호흡으로 스며들게 되는 그러한 것. 입구부터 냄새를 놓았던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뚜렷한 메세지여서일 것이다.
입구의 향부터 전시장 곳곳에 있는, 여성들의 체취를 배양했다는 박테리아 작품에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성인 내 체취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마냥 숨기려고 하고 때론 부끄럽게 여긴 적은 없었을까?
다시마로 만든 누에고치 같기도 한 매달린 조각 앞에선 전통적 조각의 재료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이걸로 이걸 만든다고?' ㅎㅎ 비린내가 나는지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볼 수는 없어서 짐작만 했다. 아마도 공기 중에 섞여 있었을지도. 고치들은 은은한 빛으로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는 나방이 안에서 날아다니는 것 같았고.
촉수를 가진 방산충들은 기계라고 말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게 빛나며 움직였다. 그 밑의 웅덩이들 역시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나에겐 웅덩이 자체가 여성스러운 그 무엇이다.
꽃튀김과 아령. 향기가 있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웠던 꽃에 밀가루 튀김옷을 입혀 튀겨냈고, 관념적으로는 튀김 향만 남겠지. 튀김꽃은 이것이 한때 꽃이었던 것을 잊게 만들만큼 강력했다. 꽃향을 덮고 튀김냄새를 씌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각적인 아름다운 꽃을 덮어버리는 튀김. 멀리서 보면 뼈 같기도 했고. 기름으로 튀겨낸 그것 뒤엔 아령이 있었는데, 튀김을 많이 먹은 사람은 아령을 들어야 할 수도. ㅎㅎ 혹은 튀겨져 변화된 살, 몸은 아령의 무게로 중력을 버텨야 대신할지도.
튀김꽃을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여 어딘가에 균열을 내게 한 꽃튀김조각들은 또한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들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이걸로 이걸 만든다고?'(2). 고대의 존재와 현대의 재료가 만나 딱정이 같이 보이기도 했던 선캄브리아기의 생물들을 플라스틱 화석으로 만든 조각.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콤부차 가죽이 가냘프게 빨래처럼 널려져 있는 조각이라니.
마치 부글부글 끓이는듯 둥둥 떠다니는 렌즈가 들어있는 향수병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혹은 기존의 예술이 그동안 두 눈과 두 귀에만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한다. 보글보글 눈알이 끓여지는줄 알았다. 맞다. 눈을 감으면, 세계는 안과 밖이 없어진다.(이건 나의 말이다) 눈을 감으면, 입구가 출구가 될 수도 있고, 눈으로 보고 정해 놓은 기존의 규칙, 가치관은 한낱 하나의 틀, 과거의 신화가 될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냄새, 더듬어 다가갈 수 있는 촉감은 그동안 고착된 시각에만 의존하던 세계를 다르게 느끼게 해 준다. 작가는 냄새나 향, 체취, 이른바 후각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작가였다. 생각해본다. 예술에 후각, 냄새를 가져온 사람이 있나? 이불의 생선냄새 말고는 잘 안떠오른다.
새로운 접근이어서 말 그대로 새로웠다. 재료와 매체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 작가의 제안으로 우리는 또 다르게 이 세계를 호흡할 것 같다. 예전에 말했던 시덥잖은 두 눈은 피곤하니 잠시 쉬게 하고 말이다.
리움미술관, ANICKA YI 전시 <THERE EXISTS ANOTHER EVOLUTION, BUT IN THIS ONE>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