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즈 부르주아의 <히스테리의 아치>를 보고.
어느 날 우리는
아치를 그리고 있는 모습으로 허공에 매. 달. 린. 다.
뒤로 재껴져 골반을 꼭짓점으로
두 팔과 두 다리의 끝은 무게중심을 가지며 아래로.
할 말을 잊은 채, 이미 조각났거나 기억이 상실되기를 원하거나
차라리 아무 생각 없는 집중된 찰나의 자태.
마지막 보루였던 몸은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며 숨을 곳 또한 없을 때.
자신이 그토록 쉽게 반응되고 분열되는 물질임을
한바탕 내 안의 소동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곳 내 몸에서 빠져나와 나를 보라.
기이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매달려있지 않은가.
그렇게 한번 휘면 그뿐.
한차례 아우성은 그렇게 지나간다.
히스테리는 또 다른 히스테리가 절정이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때마다 다시 생성되고 매번 아치를 그릴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죽고 삶을 반복할 것이다.
그 순간은 같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활처럼 휘어진 몸은 차라리 환희에 가까운 듯하다.
어쩌면 아치는 점점 더 원을 그릴지도 모른다.
히스테리의 둥그런 원으로 온몸이 노래를 할지도.
* 20대의 끝무렵인 2000년 10월 15일에 왜 이런 걸 적어두었는지.
수첩에서 발견하고 그대로 옮겨본다.
부르주아의 전시는 그보다 한참 전에도 본 것 같은데, 그땐 pillar였고, 거울이 작게 있었고,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던 전시였는데, 히스테리의 아치는 이미지로만 본 것인지 어쩐지 기억이 선명히 나진 않는다.
알려진 이미지인 거대남근을 든 노년의 호탕한 할머니의 흑백이미지가 참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드로잉들은 상처투성이였고, 그래서 엄마거미는 그렇게 크고 아름다운 거다.
그리하여 다시 나에게 묻게 된다.
넌 너의 상처를, 너의 맨얼굴과 맨살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만질 수 있니?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