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 집은 섬에 있었다. 부모님이 만난 그 섬이다. 부모님의 고향이 제주도라는 이유가 아니었다면, 둘을 당기는 인력은 척력을 절대 이겨내지 못했겠지. 그런 점에서 나는 제주에 빚을 지고 있다. 결혼할 마음이 거의 없었던 어머니를 구슬렸던 조부모님에게도.
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녹초가 된 건 상실감보다는 지독한 말 때문이었다. 친척들 간의 비난은, 중간에서 듣고만 있기에도 힘들었다. 밤중에 먹은 국수에 체한 건지, 악에 받친 말에 체한 건지 뜬 눈으로 밤을 새워 버렸다.
그다음 날, 장례를 마칠 때만 해도 제주에 남은 행운이 있을 줄 몰랐다. 그것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며칠 간의 고난을 말끔히 씻어내는 행운이었다.
시작은 '시인의 집'이라는 간판을 건 카페에 간 것이었다. 작은 카페였지만, 넓은 창을 열어젖혀, 바다와 맞닥뜨릴 수 있게 한 카페였다. 코앞에 있는 현무암으로 인해 마치 공중에 있는 카페처럼도 느껴졌다면 과장 같을까.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카페를 지은 시인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한편에는 읽어보고 싶었던, 손세실리아의 시집이 꽂혀 있었다.
그녀의 시들은 유독 쇠약한 사람과 자연을 공경했다. 시인이 말하는 황홀한 광경에는 눈길 받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배경조차 되지 못했던 것들은 비로소 시를 통해 살아났다.
카페의 주인은 어떤 분일까 궁금하던 와중, 옆에 청년이 서빙을 하는 분에게 다짜고짜 "사장님이 시인이에요?"라고 묻는다. "맞다"라고 답하는 사장님이다.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을 든 건, 주변에 있는 시집 모두가 손세실리아 님의 시집이었다는 것이다.
쇠잔한 자연과 사람의 시를 쓰던 손세실리아 님은 바다와 맞닥뜨린 폐가를 사들여 카페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주 조천의 용천수를 지키는 모임을 하고 있었다. 외가와 가깝게 '시집의 집'이 있었고, 손세실리아 님은 외사촌과 그 모임을 같이 하는 사이기도 했다. 행운으로 기억되는 만남이고, 시인이 말처럼 이어질 만남이다. 그다음 날도 시인의 집에 방문했고, 제주 하면 꼭 들을 장소가 생겼다.
일상을 벗어나는 건 행운보다 예기치 않은 불행이 대다수라 느끼고 살았다. 다만, 10년 만에 간 제주에서는 불행뿐만 아니라 그를 위로하는 행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