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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밍한 밍 Mar 24. 2024

장엄함의 간접체험

밍의 책장 #16, <두더지 잡기>

  동선동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작은 책 한 권. 이 책은 '블라인드북' 콘셉트로 종이에 꽁꽁 감싸져 있었다. 꽁꽁 감싸져 있는 포장엔 다음의 글귀 한 구절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한 발 앞에 또 한 발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내딛는 일에 대해 생각합니다. 평범하게 존재하는 일의 장엄함에 대해서도요. 종교가 없는 제게 이런 책은 기도이자 명상이기도 해요. 바다에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책장에서 꺼내 읽을 수 있는 '가까운 바다' 같은 것이랄까. 기껏 맞고 싶은 파도를 여기 둡니다.


  처음 글귀를 접했을 땐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장엄함, 기도와 명상, 바다 등..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길래 이러한 큐레이팅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둘러 쌓인 책을 덥석 집어 들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두더지 잡기>. 영국의 시인이자 정원사, 전직 두더지 사냥꾼인 마크 헤이머의 두더지 사냥꾼으로서의 삶과 사냥꾼으로서 활동하는 동안 느꼈던 삶에 대한 그의 통찰을 느껴볼 수 있던 책이었다.


  10대 시절의 그는 아버지로부터 집에서 쫓겨나 말 그대로 대자연 그 자체를 누빈 시기가 있었다. 숲 속을 거닐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영위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강둑과 해변에 누워 잠을 청하며, 대자연이 주는 소리와 경치, 장엄함 등을 온몸으로 느낀 때가 있었다. 인간의 시점에서 바라보았을 땐 '홈리스', 노숙의 삶을 살 때였고, 자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하나의 야생 생물에 불과했던 그런 때.


  자연의 삶 속에서 녹아들었던 때, 그는 이야기한다. 그가 조용히 하면 할수록 주변의 동물들 역시 긴장을 풀으며 더 많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반대로 그가 소리를 내면 낼수록 그의 주변은 조용해지기 일쑤였다. 아마 그의 소리가 커지며  커질수록, 그는 자연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러 벌레와 곤충 등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도 그는 물리지 않았다. 오직 그의 부주의가 있었을 때 그것들로부터 쏘이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는 자연과 '교감'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 그 자체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던 때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대의 일부를 자연과 함께 거닌 후, 그는 다시 인간의 삶 속으로 돌아왔다. 인간들의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어느 날부터 두더지 사냥꾼으로서 그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두더지 사냥꾼을 하며 알아낸 여러 두더지들의 특징과 두더지 사냥꾼만이 알 수 있는 소소한 팁(?)들을 무덤덤하게 풀어낸다.


  그가 두더지 사냥꾼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던 때 역시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을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두더지를 잡을 때 '덫'이라는 도구 외에는 거의 살생을 일삼지 않았던 그.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어느 순간 위선자에 겁쟁이로 느껴졌고, 화가 났고 슬펐으며, 불쾌감마저 들게 됐다. 그렇게 그는 두더지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내려놓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로 돌아갔다.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정원사로서,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에게로.


  그의 이러한 표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보니 으레 이런 단어가 떠올랐다. '초연하다.' 인간의 삶이 주는 것을 초연한 듯한 그의 문장을 들여보고 있으면, 어딘가 맘이 편안해져 오는 기분이 든다. 휘몰아치듯 들어오는 일감을 하나하나 쳐내어 가며, 때론 편두통을 이끌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속에서 그의 초연한 문장은 나에게 찰나의 평온함을 선물로 주었다.


  마지막까지 책장을 덮은 후, 큐레이팅의 구절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구절의 뜻을 해석하며 나의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 장엄함. 바쁘디 바쁜 삶을 보내오며 문득문득 탁 트인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싶은 그때. 바다를 직접 바라볼 수 없을 때, 간접적으로 충만하게 느껴볼 수 있는 그런 책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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