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랭바레증후군, 서른세 번째 이야기
"저 휴가 다녀올게요."
한 마디를 남긴 채 치료시간에 영영 볼 수 없게 된, 반년을 함께 했던 물리치료사. 어느 날 점심시간 후 짬 내어 내가 치료를 받고 있는 층에 내려왔다.
"어? 선생님 이번 타임에 여기서 치료 있으세요?"
"아뇨~ 밍님 인사드리려고 짬 내서 내려왔죠~"
"헉 정말요? 감동이에요 선생님. 그동안 재밌게 치료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도 밍님 덕에 재밌게 치료할 수 있었어요."
"이제 못 봐서 어떡해요 잉잉. 너무 아쉽다."
"아 이 영혼리스~."
"아니 진심이에요."
"에이~~ 바뀐 치료사 선생님이랑도 열심히 하시고 얼른 퇴원하세요!"
"퇴원하면 밥 한번 먹어요!"
"아유 그럼요. 저야 영광이죠."
"아니에요. 제가 영광이죠. 선생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감사했습니다."
"밍님 그냥 레그레이즈는 잘하시니까 제가 저항을 좀 줘볼게요."
"네."
왼쪽 엉덩이가 약하기에 왼쪽 발목 쪽에 저항을 주는 치료사. 숨을 크게 내뱉으며 모든 세트를 수행했을 때 왼쪽 중둔근이 파르르 떨려온다. 근육이 조여 오는 이 느낌이란.. 내심 반가운 기분이 든다. 한편으론 자극이 오는 만큼 근육도 얼른 붙어줬으면 하는 소망은 있지만, 소망은 소망일 뿐.
"자 이제 런지 한번 해볼까요? 선생님, 왼쪽 발목 좀 안 꺾이게 잡아주세요."
치료 참관을 들어온 실습생에게 발목 고정을 부탁하는 치료사. 그 덕에 벽에 손을 댄 채 어찌어찌 런지 자세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오른쪽 허벅지 힘이 많이 약하기에 왼쪽으로 지탱하는 힘이 더욱 커지고, 덩달아 힘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왼쪽 발가락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발가락으로 베드를 누르는 그 압력을 발가락이 견디질 못하나 보다. 파르르 떨려오는 오른쪽 허벅지와, 자꾸 안쪽으로 접혀 들어오는 무릎은 덤.
엉망진창이 따로 없다.
이어지는 밸런스 볼 위에서 균형 잡기.
"어어! 밍님 손 떼세요. 저한테 기대시면 안 돼요. 어어!"
치료사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버텨야 하는 것을 분명 머리는 안다. 문제는 머리만 안다. 발목 안정성이 많이 떨어지니, 손을 뗌과 동시에 고꾸라질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 이 엄습함에 사로잡혀 본능은 치료사의 어깨를 쥐어진 손을 놓지 아니한다.
그나마 치료사가 몸통을 고정시켜주고 있어서 호흡을 크게 들이쉰 채 손을 조심스레 떼보는 시늉을 해본다.
"자 이제 앞으로 체중을 실어볼게요."
"으으으."
"아니 이상한 소리 내지 마시구요. 앞으로 체중을 실어볼게요. 왼쪽 더 눌러야죠. 어어 저한테 기대시면 안 돼요."
억울한 게, 난 분명 왼쪽에 있는 힘껏 힘을 줘서 앞으로 발목을 기울이는 시늉을 분명하고 있는 중인 셈인 점이다.
머리에선 분명 치료사가 말한 대로 발목을 앞으로 기울이며 몸의 무게중심을 앞으로 보내라는 전기신호를 보낸 것이 틀림없는데, 이놈의 발목은 당최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네.
"밍님 코어가 어느 정도 잡혀있는지 확인해보려고 해요."
"아 네. 제가 코어가 좀 튼튼하긴 해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몇 가지 동작 말씀드릴 테니 한번 확인해 볼게요."
"네."
레그레이즈와 버드독 자세. 레그레이즈는 최근 아침마다 하고 있는 자세였기 때문에 곧잘 수행하나, 버드독 자세를 취할 땐 살짝 겁이 난다. 왼쪽 다리를 뒤로 내뻗을 때 왼쪽 중둔근이 잡아주지 못해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 웬걸? 의외로 들어지네. 다행이다.
허리 위에 베개를 올려두는 치료사.
"베개가 떨어지지 않게 코어 힘줘서 버텨주세요."
"네."
"오 밍님, 코어 튼튼하시네요. 확인했습니다."
새로 바뀐 치료사로부터 코어가 튼튼하다는 입증을 받았다.
병실 내 탕비실(?)에 양파 두 개가 버젓이 놓여있다.
이걸 보고 있자니 문득 좋은 말 양파, 나쁜 말 양파가 떠오른다. 유사과학에 걸맞은 그 실험. 좋은 말을 해야 한다는 취지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정작.. 크흠..(침착맨 실험에 의하면 나쁜 말 양파가 더 잘 자랐다고... 심지어 좋은 말 양파는 얼마 안 가 시들었다.)
그저 양파 두 개를 관찰할 뿐임에도 즐겁다. 새롭고. 또 짜릿하다.
덩달아 평소 과자나 컵라면 등 이것저것 노나 주는 것에 고맙다며 피자를 돌리는 병실 옆자리 환자와 택배로 빵을 너무 많이 받았다며 하나씩 맛보라고 노나 주시는 다른 환자 한 분.
조용하지만 정나미 넘치는 우리네 병실.
허벅지에 세라밴드를 묶을 채 수동자전거를 돌릴 때, 유독 왼쪽 허벅지의 뼈마디가 툭툭 빠지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예 세라밴드를 풀고 타기로 자체 결정을 내린다.
"어? 이제 세라밴드 안 묶고 타세요?"
"네. 자꾸 고관절이 툭툭 빠지는 거 같아서 그냥 빼고 타려구요."
"아 그러시구나. 화이팅."
자전거를 열심히 돌리고 있을 무렵, 두 명의 악의 무리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승모근에 슬그머니 올라오는 두 손과 동시에 느껴지는 압력.
"악! 잠깐만요 악! 살려주세요."
"에이 근육 뭉쳤을까 봐 풀어드리는 거예요~ 하나도 안 아프시잖아요~"
"아니 제가 대신해드릴게요. 아악!"
"전 괜찮아요 ^^"
다른 한 명은 등받이 의자에 힘을 주어 비스듬히 누워있는 의자를 수직으로 세워준다.
그러고 옆으로 와서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밍님 저 어제 뭐 먹었게요?"
"어제 맛있는 거 드셨어요?"
"네. 어제 마라전골 먹었어요."
"맛있었겠네요."
"그쵸~? 사진 보여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아니에요. 사진 보여드릴게요."
"아니 이거 기만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도 맛있는 거 먹을 줄 안다구요."
"어 어떻게 알았지? 맞아요~ 기만하는 거예요."
"휴 그럼 기회 드릴게요. 어디 맘껏 기만해보세요."
"흐흐 자 여기 보세요."
"아..? 비주얼 별론 데요."
"아니에요. 자세히 봐보세요. 엄청 맛있다구요."
"아 이제 기만시간 끝났어요. 빨리 가보세요."
"아 진짜~"
기만쟁이 같으니. 아무튼 마라를 그렇게 찾아 먹진 않기 때문에 별로였다. 아무튼 별로였다.
아주대학교 병원으로 외래를 다녀온다. 입원했을 때와는 다른 주치의지만 길랭바레증후군에 대한 소견은 똑같다.
"말초신경이 손상된 경우 신경이 조금씩 재생되곤 해요. 최소 1~2년 정도 봅니다. 장애인등록신청서류도 최소 2년 이상은 지나야 작성해 드려요. 그리고 조금씩 개선되는 점도 보이셔서, 아마 지금 신청해도 안될 거예요.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경을 빨리 자라게 하는 약은 없어요. 지금처럼 꾸준히 재활받으시면서 신경이 재생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할 따름이에요."
차마 지금 입원 중인 병원에 소견서를 요청했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주대병원 주치의가 바뀌었는데, 장애인등록신청서류는 최소 2년 이상 지난 후에 작성해 주신다고 하시더라구요. 지금은 개선되고 있는 중이라 어려울 거 같다고도 하시네요."
"아 그쵸. 발병 이후에 계속 좋아지고 있는 부분이 보이셔서 등록이 안 될 수도 있으세요."
"흠 알겠습니다. 그래도 요건은 충족됐으니 신청은 한번 해보려구요."
그렇게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구비한 장애인등록신청서류를 제출했다. 담당 부서로 이관되고 난 후 약 1~2달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과 심사 중 미비된 서류가 발생하면 담당 부서에서 보충 서류와 관련된 연락이 갈 것이라는 안내를 받는다.
만약 되면 되는대로 앞으로의 취업 계획 가닥을 생각해 본다.
안되면? 안되면 안 되는 대로 기존과 동일하게 가야지 뭐.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컨디션은 괜찮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운동기능이 좋아지는 것도 느껴지구요."
"다행이네요. 그럼 동작 몇 가지만 확인해 보도록 할게요. 누워보신 다음에 발목 들어보시겠어요?"
회진 때 발목을 앞뒤로 까딱까딱 움직여보고,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위아래로 들어본다.
발목의 가동범위가 좀 더 좋아졌고, 오른쪽 다리는 누운 상태에서 곧잘 들어진다. 왼쪽 다리는 안 올라갈 줄 알았는데, 웬걸? 드디어 올라가지네. 비록 살짝이긴 하지만 올라가지는 게 어디냐 싶다. 하지만 근지구력은 아직 많이 부족한 듯하다. 조금만 더 버틸라치면 골반이 훅 빠져버린다.
"꾸준히 좋아지고 있으시네요. 지금처럼 열심히 운동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마 몇 달 전에 약은 없고 그냥 재활과 시간이 답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텐션이 저세상을 향해 곤두박이칠 쳤을 것임이 분명하다. 아직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시기였으니.
날씨 좋은 날, 밤하늘을 밝히는 달을 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해서 듣다 보니 무뎌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하루아침에 좋아질 것은 아니니, 차곡차곡 누적되는 것을 온전히 기다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