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랭바레증후군, 서른두 번째 이야기
"선생님 저 이거..제가 드릴 게 이거뿐이네요."
"아니 밍님 이게 뭐예요. 이렇게 감동 주시기예요? 이거 자랑해도 돼요?"
"아니요. 자랑은 안 돼요~"
"알겠어요. 와 진짜 감사해요 밍님."
10월 말부터 오전 작업치료를 함께 한 치료사가 퇴사를 한다. 퇴사선물로 건네줄 무언가를 고민하다 마땅한 것을 생각해내지 못한 채, 손 편지 한 장만을 꼬깃꼬깃 접어 건네준다. 잠시 쉬어간다는 치료사. 앞 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며 보내준다.
"그래도 왼쪽 종아리 근육이 많이 올라오긴 했어요."
"그동안 선생님께서 잘 케어해 주신 덕입니다."
"당연하죠~ 밍님도 그만큼 열심히 따라와 주신 덕이예요. 밍님 치료시간이 제 힐링 시간이었는데.."
진짜 가시는구나. 그래서 다른 치료사가 참관을 들어온 거였구나. 인수인계 하고, 환자 상태도 볼 겸.
덩달아 담당하시던 물리치료사 선생님도 순식간에 변경되었다. 휴가 다녀온다는 말을 뒤로한 채, 해당 치료사는 더 이상 치료시간에 볼 수 없게 됐다.
그렇게 두 명의 치료사가 사라졌다.
오전을 새로 담당하게 된 작업치료사가 몸 상태를 확인해 본다. 앞으로 걷고, 옆으로 걷고, 뒤로 걸어본다. 아직 왼쪽 엉덩이로 받치는 힘이 부족하여 허리를 들어 앞으로 뻗어가는 오른발 다리.
옆으로 걷는 건 조금은 미숙하게나마 조금씩 이행할 수 있게 됐고, 뒤로 걷는 건 왼발의 발목과 앞꿈치, 발가락 상태가 영 메롱 거리는 관계로 발바닥 전체가 동시에 바닥에 닿는 형세를 보인다.
"밍님 사회에 있을 땐 어떤 일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저 사내강사 했었어요."
"사내강사요?"
"네. 사내 교육팀에서 직원들 대상으로 교육하는 거예요."
"아~ 그래서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그럼 대게 오래 서있으시겠네요."
"네.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3~4시간 강의도 하곤 했었어요. 거기에 약간의 동선이나 제스처까지 포함하기도 했구요."
"잘 알겠습니다. 지금 상체 쪽 움직임은 어떠신가요?"
"상체는 멀쩡합니다. 하체 쪽만 근력이 생기면 될 거 같아요."
"좋아요. 그럼 코어랑 하체 운동 위주로 운동해 보도록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일은 휴가라서 다른 치료사분이 오실 거예요. 저랑은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해보도록 할게요."
다음날 커버 오신 다른 치료사랑 플랭크를 수행해 본다.
"코어 운동 해보도록 할 텐데, 엎드려보시겠어요?"
"아 설마 플랭크인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플랭크 해볼 텐데 힘들면 그냥 엎드리시면 돼요."
그렇게 플랭크 자세를 취한다.
"와 밍님 플랭크 엄청 잘하시네요! 코어가 상당히 튼튼하시네요."
"코어는 매일 같이 뿌심당하고 있거든요."
"역시 그러셨군요. 진짜 튼튼해요."
"다 훌륭한 치료사 선생님들 덕분이죠."
오후 한 타임을 담당하게 된 새로운 물리치료사가 보조테이블을 끌고 온다.
낯가림 있는데 큰일이네. 말 트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데, 한동안 적막으로 가득 찬 시간이 이어지겠네.
"안녕하세요. 앞으로 물리치료 함께 하게 될 치료사 000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난 오전에 봤던 그 물리치료사였다. 작업치료 당시 수행했던 종아리 드는 운동을 하기 위해 보조테이블과 발판을 준비해 온 치료사.
"지금까지 하셨던 종아리 드는 운동 기억하시죠?"
"네."
"그거 해보도록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아 선생님, 그리고 인수인계받으신 거도 좋고 중간에 해보고 싶은 거 있으시다면 언제든 들고 오셔도 좋아요. 저도 최대한 어디에 자극이 오는지 말씀드릴게요."
"네, 좋아요. 저도 공부하면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시간엔 함께 해온 치료사와 지속적으로 운동을 한다.
조금 두꺼운 원통형 폼롤러 위에 발바닥을 얹은 채 앞뒤로 발을 굴려본다. 근데 오른쪽 무릎이 자꾸 안쪽으로 돌아가네.
"오른쪽 무릎이 안쪽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선생님, 무릎 고정하면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붕 떠요. 그리고 허벅지가 엄청 땡겨요."
"발바닥이랑 발목이 아닌 허벅지로 운동하고 있단 증거예요. 힘을 잘못 쓰고 있으시단 거죠. 다시 힘 빼고 천천히 해볼게요."
평행봉에선 평행봉을 양손으로 꽉 움켜쥔 채 발을 진자운동하듯 앞뒤로 움직여본다. 그와 동시에 틀어지는 골반과 몸.
"아니 이게 틀어지면 안 돼요. 엉덩이에 힘 빡 주고 버티세요."
엉덩이엔 나름 최대의 힘을 주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몸이 틀어지니 결국 팔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산 넘어 산이네.
지난주 행정복지센터에 방문하여 안내받은 장애등록신청 서류를 받았다. 6개월 치의 의료기록이 담겨있는 내용이다 보니 그 분량이 상당하다. 와.. 이 정도의 서류뭉치는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데?
서류를 수령하고 그 내용을 쭉 훑어본다. 재활병원으로 입원했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지난날 점차 변화가 일어나던 기억과 덩달아 휘몰아쳐오던 수많은 감정들이 쓰나미 마냥 순식간에 덮쳐온다.
'그래. 발병 초기엔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지.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 밝은 척하기도 했고, 무력함과 억울함에 잠식되기도 했지만 애써 티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지. 남들에게 토로해 봐야 별 수 있겠냐는 생각에. 그렇다고 토로하지 않았던 건 또 아니고. 순전히 모순덩어리의 시간들이었지. 괜스레 가벼운 말 한마디에 혼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감정을 벗 삼아 괜스레 병원 옥상에 올라 달을 바라보며, 그 감정을 다시 되뇐다.
익숙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예민함과 모순덩어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