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
가까이 있자꾸나. 흰모래 위 햇빛 아래 서 있는 미란을 나는 답삭 업었다. 외로웠는가. 미란은 얼굴이 납작해질 정도로 내 등에 얼굴을 대고 문질렀다. 잊으려고 하지 말아라. 생각을 많이 하렴. 아픈 일일수록 그렇게 해야 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잊을 수도 없지. 무슨 일에든 바닥이 있기 않겠니. 언젠가는 발이 거기에 닿겠지. 그때, 탁 치고 솟아오르는 거야.
<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 中>
이사를 하면서 책장 정리를 했었다. 회색 먼지가 측면에 눈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몇 번씩 읽었고 너무 아꼈던 책들인데 다른 것들에 밀려 우선순위에서 벗어나게 된 거다. 책 정리는 노동이구나 할 정도로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태어나 그렇게 많은 노끈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숨바꼭질하다 이제야 겨우 땡-을 듣게 된 사물들처럼 사이사이로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전, 책갈피, 당시엔 찾아도 나오지 않던 , 더 이상은 유효하지도 않은 카드, 소소한 분실물들이 수북했다.
그렇게 수북한 틈에서, 너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를 발견했다.
그래서 기억이란 게 무섭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인데도 보자마자 아, 저것의 정체는 무엇이구나 잊힘이 무색하게 쉽게 파악이 가능해지니 말이다. 괜한 아련함에 지기 싫어서 눈길을 돌렸지만 너도 알다시피 매번 감정에게 지는 사람이 나니까. 썼다 지웠다 수없이 반복해 겨우 완성된 편지였다. 딴에는 부끄럽지 않다며 덤덤하게 썼던 것 같은데 유치한 건 당연하고 되지도 않게 어른인 척 휘갈겨 내려간 내용이 재밌어 아주 웃긴 개그 코너를 본 사람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너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쓴 편지였다. 나는 말보다 글이 더 편하다 생각한 사람이었고 리듬도 표정도 없는 것이 또 글이라는 것이라 퇴고를 반복하는 작가처럼 심혈을 기울여 쓰긴 했었다. 고작 편지 하나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난 너에게 내가 할 말들을 모두 적어 보여주듯 애를 썼다. 전하지 못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고백하는 소녀처럼 두근댔지만 막상 너의 얼굴을 보니 용기는 금세 힘을 잃었다. 그렇게 따뜻한 너를 두고 왜 나는 전하지 못했을까. 아마 너라면 두고두고 간직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 뒤돌아보면 다행이었지 한다. 고작 종이 몇 장도 깊은 추억으로 남으면 엄청나게 무거워 버리지도 못하게 되니까.
굳이, 먼 훗날 되새겨질 추억을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