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쓰다 보면 누군가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있다와 없다는 공생 한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누군가가 머물다 떠난 자리일까.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일까. 당신의 마음속 빈자리는.
<황경신, 생각이 나서 中>
아기가 먹을 과자를 뜯다가 상자 모서리가 엄지손톱 밑을 파고 들어갔다. 아뿔싸, 그 아픔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 아픔이었다. 딱히 드러나지도 않으면서 가만히 있어도 아프고 살짝만 건드려도 으악 소리가 나도록 쓰리다. 하루 정도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두었다. 다음날이 됐고 상처는 여전히 아프게 머무르고 있었다. 연고를 열심히 발라봤자 어차피 필요했던 건 약간의 시간이었다. 하루하고 다음날 오전쯤이 지나자 아픔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튿날을 거의 채울 오후 즈음엔 완벽히 재생이 되어 상처는 아물었다.
내 손톱 밑의 상처는 세상에서 제일 아픈 상처다.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가 얼마나 큰지는 전혀 상관없이 어찌 됐건 내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게 가장 아프고 가장 큰 일인 거다. 멀리서 떨어져 보면 당연한 사실이라 기억해서 타인을 대하게 되지만 상대와 너무 가깝거나 허물이 완전히 없어져 헐벗는 사이가 됐을 경우엔 이 당연한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타인을 더 위할 때가 꼭 생긴다. 반대로 이 사실을 너무나 선명히 기억한 결과 타인에게 나만 위해 달라고 떼를 써 졸지에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 두 경우 모두를 겪어 보았는데 후에 더 마음 쓰이는 쪽은 내가 이기적이 된 경우이고 더 상처 받아 울게 되는 경우는 전자가 됐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경우에겐 깨달음과 배움이 대가로 돌아오긴 했다. 이해득실을 따져 가며 행동하자는 것과 오지랖도 적당히 부려야 보기 좋다는 것. 인간관계에서 이해득실을 따져 행동한다는 게 가식적이고 계산적이라 , 순수하지 못하다 생각해서 갈등이 많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반복된 상처엔 반드시 잘못된 행동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적당한 거리는 항상 숙제로 남는 거지만 염두를 해둬 관계를 이어가야 내가 덜 상처 받고 건강한 사이를 유지하게 되는 것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들여다보면 모두 상처투성이, 난도질된 마음 바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와중에 번지르르한 겉모습만 보고 깨끗하고 반질반질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 오해해서, 상대방을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대했던 건 엄청난 실수였다. 그 사람이야말로 열 손가락 손톱에 모두 가시가 박힌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건 재정상태뿐만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내 손톱 밑에 상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받을 자격이 없는, 그러니까 감사함도 모르면서 받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염치없는 사람에게 에너지 소모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처음 한 두 번이야 갖고 있는 에너지가 꽤 있다 보니 신나게 퍼주기가 되겠지만 차츰 반복되는 행동은 깨진 독에 물 붓기로 결국 내가 시들어 죽게 된다. 약간의 피만 났던 상처가 염증이 나 곪고 어쩌면 살을 베어내야 하는 큰 부상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은 별로 없지만 그나마 손꼽아 보자면 선택과 책임을 혼자 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아픈 것이듯 당신의 상처도 아프다는 걸 아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 조금 아픈 건 혼자 견딜 수 있다. 모두에게는 자가 치유능력이 있고 그것은 조물주가 주신 많은 선물 중 하나라고 본다. 사람 속에 파묻혀 살아도 내 손톱 밑의 가시를 빼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관계들이 무슨 소용일까 싶다. 당신 손톱 밑에 가시를 빼주지는 못해도 잘 낫도록 돕는, 연고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승리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