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눈에 익는 시간을 보내려면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앤 또는 당신

by 새벽뜰
제게 좋은 일이 하나도 안 일어나는 것 같아서 눈물이 멈추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노을을 보면 슬픈 마음이 사라져요. 내일은 분명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게 돼요.

<백영옥, 안녕 나의 빨간 머리 앤 中>


무르익어 가는 가을이라고 생각했더니 실상 느껴지는 계절은 왜 여전히 끝무렵 여름 같은지 모르겠다. 가을이 오니 모처럼 설렌다는 기분도 잠시, 아침저녁이 되어서야 제법 가을 맛이 나는구나 한다.


아주 오래 달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지정해둔 목적지까지 웬만큼 도착했을 것이란 기대가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숨 가쁘게 뛰어 동굴을 나왔다 싶어도 돌아보면 아직 한 계절도 다 지나오지 못하고 뭉그적거리는 사람처럼 되어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 같은 걸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사실 비교할 필요 없는 부분이지만 내가 어둠 속에 머문다는 느낌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면 , 거기다 부지런히 달리고 있다고 굳건히 믿고 있으나 숨 가쁨의 비례한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 때엔 아주 당연스럽게 사소한 빛줄기 하나도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시속 100km로 달려도 충분히 빠른 속도다. 빠르다 뿐인가 웬만한 곳을 이 속도로 달리면 계속해서 속도를 줄이라는 경고음이 뜰 거다. 나는 어느덧 30대 후반이라는 나이 계절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더 많은 것을 이룰 줄 알았고 더 다양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생겨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점점 더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받고 있었다. 겨우 손에 쥐었던 소중한 나의 무언가를 부리나케 달려오며 잃어버린 기분이 됐었다. 내가 놓쳐서 잃어버린 그 무언가는 어디에 있는, 누가 운영하는 분실물 센터로 가야만 되찾을 수가 있는 건가 고민했었다. 그런데 잃은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 었다면 내가 과연 놓치고 떨어뜨린 걸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않을까. 아무리 바쁘게 달려가더라도 귀한 것이라면 옷 속에 묻거나 신발안에 넣거나 해서라도 지켰을 것이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 마음은 아프지만 어둠이 눈에 익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서서히 기억도 안나 희미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둠이 눈에 익는 시간을 지나다 보면 생각보다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음악을 들어도 조금 더 차분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다. 책 한 줄이 유일해도 내 인생의 책인 것처럼 첫눈에 반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도 일어난다. 낮은 모두가 반짝거리기 바쁘다. 하물며 수도꼭지도 반짝거린다. 하지만 어둠이 눈에 익어야 하는 시간엔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두 눈동자 만으로도 세상 아름답게 반짝반짝할 수 있는 거다. 이 시간은 단단한 내공을 쌓는 시간인 거다.





달려라 하니처럼 엄마 찾아 매일 구슬프게 뛰기만 하면 보람보다도 분노란 놈이 더 발동하지 않을까 싶으니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빨강머리 앤처럼 씩씩하게 걷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간 한다. 앤처럼 머리가 빨갛지도 않고 주근깨를 얼굴에 그려 넣지도 않고 소매 부푼 공주 드레스를 좋아하는 앤도 아니지만 어둠이 눈에 익는 시간을 보람되게 잘 보내려면 앤을 떠올려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