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은 틀린 말이다. 달이 꽉 찬 듯 빛날 때에도 달의 반면은 어둠 속에 있다. 더 많이 가지려면 더 많은 죄를 저질러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충만할 때에도 누군가는 울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아야 사람으로서 비로소 아름답다.
<박범신, 힐링 中>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정말 기가 막힌 발상들의 범벅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쁨이, 소심이, 까칠이, 슬픔이라니.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들을 인간화하여 만들어 놓았다니 말이다. 어느 감정이 1순위가 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에겐 슬픔이의 비중이 높은 편이고 그다음은 소심이가 아닐까 싶다. 돌아가는 시국에 비추어 볼 때 슬픔이가 새삼스럽게 급부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언제부터 슬픔이 부정적인 감정이 됐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도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일상이 디지털화되면서, 마음이든 물질적이든 빈곤이 심해지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아주 별개의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디지털화됨은 결국 기계의 능력치가 높이 평가받게 되는 일이고 바꿔 말하면 굳이 사람과 대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감정적 교류는 상실되고 어쩌다 슬픔과 맞닥뜨려 위로받고 싶어도 간소화된 기계 속 일상처럼 돼버린 탓에 공감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함께 증발해 버렸다고 말이다. 슬픔은 사치이고 슬퍼할 겨를은 없는 것이다. 빈곤은 나눠 줄 게 없다. 어쩌다 슬프다 말하면, 슬퍼할 여유도 있고 살 만한가 보다?라는 핀잔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나의 슬픔이 최대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설령 나의 슬픔을 아는 상대방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고 해도 한껏 약해진 나는 상대방에게 무언갈 들켜서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스스로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옳지 못한 순환들이 계속되다 보니 슬픔이란 순수한 감정은 구박덩이처럼 소외되고 마는 거지.
내가 겪은 슬픔은 분명한 이유도 있었지만 답도 없이 그냥 불쑥 불청객처럼 만나지기도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거부한 적은 없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눈치 없는 나라서 당장은 모르는 거겠지 하며 나를 이해하려 했으니까. 슬픔을 모른 체 하면 반드시 다시 올라오기 마련이다. 냄새와 비슷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무리 가려도 희미하게 풍기는 냄새와 비슷한 거다. 슬퍼지려 하기 전에 즐거움으로 덮지 말고 슬퍼지면 마음껏 슬퍼하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된다. 눈물도 마찬가지다 참기만 하면 결국 마음 바닥으로 스며들어가 마르지도 않고 곰팡이가 되는 것처럼.
슬픔은 수시로 찾아온다. 간이역처럼 말이다. 그럴 때엔 우선 우는 것이 좋다. 마음껏 울고 나면 슬픔도 한소끔 꺼진다. 면을 삶다가 찬물을 끼얹으면 가라앉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수만 가지 감정이 떠오를 텐데 모두 느껴보는 게 좋다. 하지만 그 감정에 충실하지는 말고 물 흐르듯 흘려보내야 한다. 잡지 않으면 알아서 흘러가는 게 감정을 다루고 이기는 방법이다. 그러니, 잡고 싶어도 그러지 말고 보내주어야 한다. 슬픔의 원인을 따져 본다던가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탓하는 건 그다음으로 미뤄도 늦지 않다. 오히려 너무 이른 반성과 성찰은 슬픔에게 슬퍼할 기회를 박탈당하게 하는 것이니, 제발 그러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