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영화가 개봉할 당시 나는 임신 8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묘하게 나를 닮아있는 듯하다 싶었는데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그랬다. 개봉을 하면 가장 먼저 극장에를 가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영화 개봉 전 한창 홍보를 하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고 또 생각을 했었다. 그랬었는데 자그마치 , 일 년이라는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겨우김지영을 만날 수 있었다.
82년생 김지영 = 두려움
공식처럼 지어져서 어디를 갖다 붙여놔도 성립이 됐다. 볼 일이 있어 밖에 나온 참에 극장에 달려가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을 아주 오랫동안 했으나 결국 집으로 향했던 발걸음. 그렇게 일 년이 지나 만난 김지영은 내가 남편에게 종종 하곤 했던 말들을 똑같이 하는 여자이자 아내이자 엄마였고 꿈과 맞바꾼 현실에 굉장히도 열렬하게, 성실히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도대체 여자의 삶이란 뭘까 몹시도 고민하게 했고 결혼을 선택한 여자의 삶은 왜 모두 하나 같이 마음의 병 하나쯤은 영혼의 동반자처럼 만들어 살고 있게 되는 건가 싶었다.
남아선호 사상에 초점이 맞춰진 세상의 시선에게도 자신의 아들만 희생하며 산다고 믿는 시어머니에게도 아기와 함께 커피숍을 찾은 김지영에게 맘충이니 어쩌니 정신상태가 썩어빠진 소리를 해대는 남자에게도 ,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상스런 욕들을 쏟아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분노가 치밀었다. 반면 김지영의 친정은 어딘지 모르게 모두에게 눈치를 보고 있었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하물며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에게도 눈칫밥 먹으며 지내고 있는 입장.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는 여자들의 희생이라니. 게다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처사라는 게.
가끔 다른 사람이 되는 김지영,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 기억도 못하는 말들을 하고 마음의 병이 아주 깊어져 갔던 김지영. 그런 김지영이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아서 마음이 시렸다. 24시간 나는 없고 나를 잃어버린 채로 산다. 모두가 잠이 든 밤이 되어야 겨우 나를 되찾아온다. 나 역시 김지영과 같았다. 결혼이란 굴레에 발목 잡히지 않을 것이며 혹 그러하다한들 멋지게 균형을 맞추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녹록지 않으니까. 원더우먼도 아니고 신도 아닌 평범한 여자는 육아 하나만으로도 체력이 곤두박질 쳐졌고 아기가 어릴수록 충분한 수면은 방해였고 사치였다. 결혼 전 지겨울 만큼 도서관을 들락날락거리면서 글이란 걸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리워서 눈물이 나곤 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시간에 쫓기지 않을 수 있었던 자유와 여유가 너무 그리워서 몸서리가 쳐졌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으니까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고들 했다. 완전한 가정을 이뤘으니, 좋은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기를 얻었으니 기꺼이 나의 시간들은 희생해야 마땅한 거라고. 모두 맞는 말인데 왜 이 말들이 억울하고 서글픈지 말이다. 지영의 친정엄마가 지영으로 인해 울었던 모습은 차마 말을 못 할 정도로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고 나를 너무 많이 울렸다.
그 와중에도 다행인 건 영화가 해피엔딩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더 다행인 건 김지영을 만난 내가 많은 위안을 얻고 새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공명되던 순간들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 남편 대현의 모습에서 내 남편의 모습을 봤고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내 아기의 귀함과 감사를 봤다. 사회생활로 힘들고 세상살이로 힘들던 결혼 전엔 다 벗겨진 열 손가락 매니큐어가 그렇게도 날 초라하게 만들더니 육아와 살림에 파묻혀 사는 현재의 나는 흰 티에 묻은 아기의 이유식 얼룩이 , 김칫국물 빨간 얼룩이 종종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남편도 그랬다. 아기가 좀 더 크면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라고 힘들다고 말하면 힘든걸 충분히 알지만 이 시간을 못 가진 사람들도 있으니 감사함을 가져 보자고. 나는 나도 잘 알고 있는 말들을 마치 아주 대단한 위로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남편이 얄미워졌다. 오빠는 공유도 아니면서 왜 공유처럼 말은 하는 것이며 나는 감사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그저 많이 힘든 것뿐이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고는 "미안해" 한마디를 했다.
내 남편도 남자고 내 아들도 남잔데 영화를 모두 다 보고 난 후에도 이 남자들이 미워지지 않으니 참 다행한 일이었다. 세상에 나를 포함한 모든 김지영들이 , 부디 잘 지내길 빈다. 스스로를 낙담하지 말고 기특하다고 칭찬하면서 병들지 않기를 빈다. 응원한다. 세상에 모든 김지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