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의 하루

문을 여는 순간, 천왕봉이 나를 맞이한다.

by 루담

지리산 자락의 하루

문을 여는 순간, 천왕봉이 나를 맞이한다.

새벽안개가 산 허리를 감싸고 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산의 능선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첫 햇살이 정상 부근을 스치고 지나가며 바위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이런 순간이면 나는 잠시 문지방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도시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었던 공기의 맛. 풀내음과 흙내음, 그리고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져다주는 산의 기운.

멀리서 까치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낸다. 곧이어 다른 새들도 하나둘 깨어나며 지저귀기 시작한다. 이들의 합창이 하루를 여는 신호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찻잎을 우리는 동안, 창밖으로 산이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안개가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며 천천히 사라지는 과정은 매일 봐도 신비롭다. 마치 산이 긴 잠에서 깨어나며 하품을 하는 것 같다.

첫 모금의 차는 언제나 특별하다. 따뜻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몸 전체로 퍼져나간다. 이 고요함 속에서 나는 하루를 계획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둔다. 시계를 보지 않고도 해의 위치로 시간을 짐작할 수 있게 된 지 꽤 되었다.

점심을 거르는 날이 많다. 배고픔보다는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대신 오후 늦게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된장찌개 한 그릇, 김치와 밥. 소박하지만 이보다 맛있는 식사는 없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산의 색깔이 달라진다. 아침의 푸른 기운이 점점 따뜻한 색조로 변해간다. 이때쯤이면 가끔 길고양이 한 마리가 마당에 나타난다. 처음엔 경계하며 멀찍이 서 있다가, 며칠째 같은 시간에 나타나더니 이제는 제법 가까이 다가온다.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다. 그냥 '네가 왔구나' 하며 인사할 뿐이다.

저녁이 되면 나는 다시 문 앞에 선다. 천왕봉의 실루엣이 노을에 검게 물들어 있다. 하루 종일 함께했던 산이 이제는 웅장한 그림자가 되어 하늘을 가르고 있다. 별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하면, 나는 마당 한가운데 놓인 평상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작가의 이전글달러구트 꿈 백화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