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친구는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비닐봉지 바스락거리는 소리, 서랍을 여닫는 소리. 몇 년 전 그 일이 있었으니까 친구는 누구보다 빨랐다. 가게 문턱까지 올라온 흙탕물, 냉장고가 둥둥 떠다니던 그날. "어흑 어떡해" 하며 울면서 회관으로 피신했던 그 기억이 친구를 재촉하고 있었다.
"너도 빨리 와. 경찰이 대피하라고 했잖아."
창밖으로 보이는 하천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평소 조용하던 뱀사골 물줄기가 세 지류와 만나 거센소리를 내고 있다. 이 하천은 뱀사골에서 오는 물과 아영에서 오는 물, 그리고 원맥을 합쳐 세 군데의 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그래서 장마가 지면 으레 위험하다.
어젯밤에 엄청난 비가 왔었다. 가까운 산청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산이 무너지고 도로가 막히고... 가까운 이곳도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다. 어제부터 내린 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칠상사 입구 해탈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멀리서도 보였다. 우산을 쓴 사람들,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 옹기종기 모여서 불어난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 평소라면 한적하기 그지없던 그 자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도 처음이었다. 구경꾼들인지, 아니면 나처럼 상황을 지켜보며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인지...
나는 몇 번이고 다리와 가게를 왔다 갔다 하였다.
한 번은 물의 높이를 확인하러, 한 번은 짐을 정리하러, 또 한 번은 정말 떠나야 하나 싶어서. 발걸음이 무거웠다. 가게 문 앞에 서면 몇 년간 쌓아온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대, 냉장고, 그리고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소소한 물건들. 이 모든 것이 물에 잠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해탈교 다리 밑까지 수위가 올라오면 가게는 물이 차버린다.
친구는 꼭 가져가야 할 것들만 챙겨놓고 무심히 내리는 빗방울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참 쓸쓸해 보였다. 몇 년 전 그 악몽 같던 날의 기억이 친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말없이 비를 바라보는 친구의 옆모습에서 체념과 불안이 동시에 읽혔다.
경찰관이 왔다.
특유의 전라북도 말씨로 "아무래도 이만한 비가 한 번 더 내리면 넘을 것 같은 게, 피신 준비 하셔요"라고 하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제복을 입었지만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에 젖은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우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점차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불행 중 다행인지 비가 줄어들었다.
하늘도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람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생겼다. 해탈교 위에 모였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고, 경찰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히 네 유, 다행혀" 하고 중얼거렸다. 친구는 여전히 챙겨둔 짐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지만, 어깨의 긴장은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119 소방차는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빨간 차체가 젖은 아스팔트 위를 달려가며 사이렌 소리를 울려댔다. 아마도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상황이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소방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멀리 누군가는 아직도 위험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는 마음만 졸이다가 하루가 갔다.
비는 그쳤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친구는 챙겨놓은 짐을 다시 제자리에 놓으면서도 계속 하천 쪽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씩 일상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날의 긴장감은 오래도록 가슴 한편에 남아있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