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기억록 1화

"첫 번째 메밀꽃"

by 루담

"첫 번째 메밀꽃"

1. 지리산으로의 여행

한서연은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세를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서울의 답답한 공기와는 전혀 다른, 맑고 시원한 바람이 살짝 열린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정류장은 메밀마을입니다."

운전기사의 안내 방송에 서연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3년간 심리상담사로 일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들어왔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점점 더 메말라가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그 안에는 생기를 잃은 채 기계적으로 웃고 있는 낯선 여자가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살고 있었을까.'

그때 우연히 본 지리산 메밀꽃 사진 한 장이 서연의 마음을 흔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꽃밭 사이로 한 줄기 오솔길이 이어져 있는 그 풍경은, 마치 서연을 부르는 것 같았다.

2. 메밀마을의 첫인상

버스가 멈추고 서연이 짐을 들고 내리자, 해발 700미터 산골마을의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9월의 지리산은 이미 가을의 전령들로 가득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과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메밀꽃밭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서울에서 오셨나 보네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서연이 돌아보니, 70대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허허,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다 얼굴을 아는데, 처음 보는 분이 이렇게 큰 캐리어를 끌고 오시면 대충 짐작이 되죠. 박영수라고 합니다. 이 마을 이장을 하고 있어요."

박할아버지의 인자한 눈빛에서 서연은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한서연입니다. 이 마을에서 잠시 머물 예정이에요."

"잠시요? 이 좋은 곳을 잠시만 계시고 가실 건가요? 허허, 그럼 안 됩니다. 우리 마을 메밀꽃을 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3. 마을 탐방

박할아버지는 서연의 캐리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며 마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곳곳에 자리 잡은 작은 카페들과 게스트하우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건물들이었다.

"여기가 우리 마을의 중심가예요. 작년에 생긴 카페 '메밀향기'가 특히 유명하죠."

할아버지가 가리킨 곳에는 나무로 지은 아담한 카페가 있었다. 창문 너머로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커피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장님도 서울에서 오신 분이에요.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4. 첫 번째 만남

"아, 새로 오신 분이군요. 안녕하세요."

카페 사장이 나와서 인사했다. 따뜻한 눈빛과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김준호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서연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서연은 준호와 악수를 나누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어디서 본 듯한 친숙함이었다.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아니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저도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5. 게스트하우스 정착

박할아버지는 서연을 마을에서 가장 아늑한 게스트하우스로 안내했다. '메밀꽃 쉼터'라는 예쁜 이름의 그곳은 메밀꽃밭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와... 정말 아름다워요."

서연은 방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에 감탄했다. 석양에 물든 메밀꽃밭이 온통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보시면 더 예뻐요. 이슬 맺힌 메밀꽃은 진짜 장관이죠."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6. 첫 번째 밤

그날 밤, 서연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울에서는 항상 얕게 잤는데, 이곳의 고요함과 맑은 공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새벽 무렵, 이상한 꿈을 꾸었다. 메밀꽃밭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는 꿈이었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나 절절해서 서연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 할머니..."

꿈 속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서연은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7. 새벽의 메밀꽃밭

잠이 오지 않아 서연은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상쾌했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은 메밀꽃밭으로 향했다.

"어머, 이른 시간에 웬일이세요?"

메밀꽃밭 입구에서 70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손에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잠이 안 와서 산책을 나왔어요."

"아, 어제 오신 서울 댁이군요. 저는 이 근처에 사는 김순임이라고 해요."

할머니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8. 할머니의 이야기

"할머니, 혹시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서연의 상담사 본능이 발동했다.

"아이고,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요즘 밤잠을 잘 못 자서..."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았거든요. 기억이 자꾸 흐려져요. 특히 돌아가신 남편 생각이 나질 않아서..."

"남편분 말씀이요?"

"60년을 함께 살았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9. 메밀꽃밭에서의 기적

"할머니, 혹시 남편분과 관련된 물건이나 사진 같은 게 있으세요?"

"이것밖에 없어요."

할머니가 바구니에서 낡은 반지 하나를 꺼냈다.

"결혼반지예요. 이것만 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서연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메밀꽃밭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메밀꽃들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할머니, 저 꽃을 만져보세요."

서연이 할머니의 손을 이끌어 특별히 밝게 빛나는 메밀꽃에 닿게 했다.

10. 첫 번째 기억 여행

갑자기 두 사람은 환한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순임아, 나와 결혼해줄래?"*

*"정말요, 영수 오빠?"*

*"응, 너 아니면 안 돼."*

50년 전, 젊은 순임과 영수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20살의 순임은 지금 할머니와 똑같이 생겼지만 훨씬 해맑고 예뻤다.

*"오빠, 정말 행복해요."*

*"나도야. 평생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젊은 영수가 순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바로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그 반지였다.

11. 60년 사랑 이야기

기억은 계속 이어졌다. 신혼시절의 달콤함, 아이들을 키우며 겪은 어려움,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깊어진 사랑...

*"순임아, 우리 참 많이 늙었다."*

*"그래도 당신이 제일 멋있어요."*

*"허허, 거짓말쟁이. 하지만 고마워. 60년 동안 내 곁에 있어줘서."*

마지막 장면은 병원이었다. 영수가 순임의 손을 잡고 마지막 말을 하는 모습이었다.

*"순임아, 나 먼저 가지만 너무 슬퍼하지 마.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당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내 평생 사랑."*

12. 현실로의 복귀

기억 여행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온 할머니는 메밀꽃밭에서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그리움과 감사의 눈물이었다.

"영수... 우리 영수..."

"기억나세요, 할머니?"

"네... 다 기억나요.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든 게 선명해요."

할머니는 반지를 꼭 쥐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아가씨.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13. 서연의 각성

서연도 마찬가지로 놀라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

"저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에요. 어떻게 된 건지..."

"이 메밀꽃밭이 특별한 곳인가 봐요. 예전부터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할머니는 서연의 손을 꼭 잡았다.

"아가씨는 천사예요. 제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보물을 되찾아 주셨어요."

14. 준호와의 재회

해가 뜨자 서연은 할머니와 함께 마을로 돌아왔다. 카페 '메밀향기' 앞에서 준호를 만났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네, 좋아요."

서연은 아직도 방금 전 일이 꿈같았다.

"혹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얼굴이 환해 보여요."

준호의 세심한 관찰에 서연은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요?"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게 제 특기거든요. 뭔가 좋은 일이 있었죠?"

15. 새로운 시작

서연은 준호에게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준호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마을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아요. 메밀꽃밭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요."

"정말요?"

"네.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온 것도 있어요.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준호의 눈빛에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 그런데 박 이장님이 서연 씨를 찾고 계셔요. 급한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

16. 박할아버지의 제안

박할아버지는 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아, 들었다. 순임이 할머니 일 말이야."

"네? 어떻게..."

"이 마을에서는 비밀이 없어. 그리고 네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지."

할아버지의 말에 서연은 놀랐다.

"사실 너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 이 마을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거든."

"무슨 말씀이신지..."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네가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거야."

17. 첫 번째 의뢰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남자의 얼굴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

"저는 최민수라고 합니다. 제 아들... 제 아들이 군대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싶어요. 그날 우리는 싸웠거든요. 화해하지도 못하고..."

18. 새로운 사명

서연은 남자의 절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도와드릴게요."

"정말요?"

"네.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모든 기억이 아름답지만은 않을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알고 싶어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자신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19. 에필로그

그날 저녁, 서연은 메밀꽃밭을 혼자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이런 능력을 갖게 된 걸까? 그리고 왜 하필 이곳에서?'

메밀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서연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너는 특별한 사람이야.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확실한 목표가 생긴 것 같았다.

준호가 멀리서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너를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하얀 메밀꽃들이 달빛 아래 은빛으로 반짝이며,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다음 화 예고**: 2화 "아버지의 편지" -

아들을 잃은 아버지 최민수의 의뢰로 서연의 두 번째 기억 여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군대에서 일어난 사고의 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아픈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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