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게 다시 묻는 오십의 질문
다시 만난 질풍노도
우리 세대는 질문이 허락되지 않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군부독재 시절, 사회에 대한 질문은 당연히 금지된 것이었고 개인의 비전 역시 선택지가 거의 없었기에 굳이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특별한 초능력자나 별종이 아닌 이상, 성실히 학업을 마친 뒤 전문직 자격증을 따거나 이름난 대기업에 취업해 경쟁의 사다리를 오르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유를 얻은 후에는 말년에 사치스러운 취미를 즐기다 조용히 퇴장하는 것.
그것이 우리 세대 대부분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길은 외길이었고 우리는 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뿐이었다.
최근 드라마로 화제가 된 〈서울 자가에 대기업 김부장〉은 그 행렬의 선두 그룹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제 경제적 안정을 조금씩 체감하고, 자식들도 둥지를 떠날 준비를 하는 50대가 되자 마치 그 드라마처럼 ‘이 다음은?’이라는 물음표가 나에게도 떠오른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 마주하는 것은
먹먹한 어둠이다. 이런 질문 앞에서는 망설임 없이 답을 해야 할 나이인데도 말이다.
앞으로 남은 수십 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드라마는 명쾌하게 말한다.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라.'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안다는 것,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대부분의 선배와 또래들은 인생 전반의 과제를 어렵게 수행해가고 있거나 이제 막 도달한 갈림길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을 뿐이다.
설령 답을 찾은 사람이 있다 해도
그 답은 그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에 걸맞은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앞으로 마주할 인생의 문제들과
마지막 관문인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나의 천명(天命)은 무엇인가.
인생의 문제 해결을 위한 빅데이터, 역사
사람들은 보통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개인보다 사회 전체의 맥락을 먼저 떠올린다.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시대적 한계’라는 말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거꾸로 가보고 싶다.
서로 다른 사회 환경 속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반응했고, 그들이 남긴 선택과 실패가 거꾸로 시대에 어떤 피드백을 주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역사 속 인간들이 살았던 시대가
어떤 결말로 이어졌는지 알고 있다. 최종 정답지를 들고 문제를 다시 푸는 셈이다. 그래서 다소 우쭐한 채로 과거 인물들의 고민어린 선택을 과소평가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제는 ‘결과’보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껴안았는지, 그 문제풀이의 '과정'에 더 집중하고자 한다.
역사는 그렇게 쌓인 개인들의 분투기, 인생 문제 풀이의 빅데이터인 셈이다.
다만, 이미 수없이 해석된 위인들보다는 가급적 그 뒤편에 남겨진 인물들부터 살펴보려 한다. 그들이야말로 평범한 나, 그리고 우리와 더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시대를 앞서간 안타까운 천재도 있을 것이고 시대를 관통하며 욕을 먹는 빌런도 있을 것이며 소외된 자도, 타인을 소외시켰지만 정작 본인은 외로웠던 자도 있을 것이다.
이 여정 끝에 나에게 딱 맞는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인생의 과제 앞에 주저 없이 도전할 용기만은 얻고 싶다.
당부의 말
나는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했지만 어디까지나 역사 애호가일 뿐, 역사가가 아니다. 역사는 학계에서 생산되는 것이고 나는 전공자의 감수성 정도로 이를 소비할 뿐이다.
이 글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파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소회를 정리한 기록일 뿐
학문적 결과물은 아니다. 혹여 이 글과 학계의 정론 사이에서 충돌을 발견한다면 주저 없이 학계의 의견을 따라가길 바란다.
다만, 호기심 많은 독자들이 확인한 역사적 사실을 댓글로 공유해 나를 깨워준다면 그 또한 감사히 배우겠다.
인생을 살아보기 전에 했어야 할 질문을
반쯤 살아서야 다시 붙잡게 되었다.
이 늦은 질풍노도가 부끄럽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