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간] 조선정부 공채 1기가 잃은건 초심일까

1화 이숙번

by 초로의 궁사

화려한 비상과 급작스러운 추락

​약관에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시행된 문과에 급제한 이숙번. 불과 수년 뒤,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는다. 그리고 주저 없이 날아올랐다.


1차 왕자의 난.

휘하 번상병을 이방원에게 붙여 실질적인 무력을 제공한 것은 그였다. 이후 2차 왕자의 난, 조사의의 난에 이르기까지 이숙번은 방원이 흉중에 품은 칼이었고, 가장 충실한 심복이었다.


그의 강점은 분명했다.

결단력, 행동력, 그리고 폭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현실 감각. 방원이 마침내 보위에 올랐을 때, 숙번은 혈기왕성한 이십대였다.

눈앞에 펼쳐진 탄탄대로의 끝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는 물론, 확실한 ‘미래 권력’의 곁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왕의 측근으로 보좌한 지 16년.

이미 불혹을 넘긴 이숙번에게 삼정승 자리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왕과 수차례 티키타카를 해본 그는, 태종에게 서운함을 표시하고자 수개월간 조정 출입을 끊었다. 하지만...

그 사이 들려온 조정의 소식은 충격이었다.


나보다 한참 아래인,
그 어수룩한 박은이 우의정이라니…


서운함에 내뱉은 혼잣말은 왕의 귀에 들어갔고,

그에 대한 피드백은 혹독했다. 그는 이후 20여 년간 조정을, 그리고 한성을 떠나야 했다.


태종 이방원은 이숙번을 신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위험하게도 여겼다.

군사와 정보, 불온한 기운을 다루는 데 이숙번만큼 유용한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태종이 진정으로 만들고자 한 국가는 '사람의 충성’이 아니라 ‘제도의 권위’ 위에 선 나라였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숙번은 제도를 믿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혁명기의 논리, 즉 위험하면 먼저 치고 본다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정치적 제거, 사적 판단, 과도한 권력 행사.

혁명기에는 미덕이었으나, 치세에는 불안 요소였다.


결국 태종은 결단한다.

충성심과 능력은 인정하되,

국가 시스템 안에 둘 수는 없다.


내가 거두지 않으면, 후대에는 반드시 권신이 될 자다.


숙청이 아니라 ‘배제’


조야의 처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숙번은 처형되지 않았다. 그는 반역자도, 배신자도 아니었다.

다만 조선이라는 조직이 성장하면서 이상 필요하지 않은 인재가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로 치면 이렇다.

스타트업 초창기, 밤새 회사를 살린 핵심 멤버.

그러나 회사가 상장하고 규정과 감사가 생기자

가장 먼저 ‘위험 인물’로 분류되는 사람.


조선정부 공채 1호는 그렇게 역사의 역할을 다하고 물러났다.


세종 20년 겨울...​


왕이 내려준 옷을 입고 한성에 들어선 사람은 환갑을 훌쩍 넘긴 추레한 노인이었다.

세종은 왕자의 난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요구했고, 이숙번은 먼 함양에서 걸음을 재촉해 막 경성에 도착했다.

한때 자신이 호령하던 종로의 저잣거리에 서서

그가 품은 것은 회한이었을까,

아니면 헛된 희망이었을까.


한마디 더: 약관에 사시 패스하고 43세에 정리해고 당한 조선의 차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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