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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유 Apr 26. 2018

고달픈 하루를 보낸 그대에게

명화 'Nameless and Friendless'가 건네는 위로

최근 수년간은 늘 취업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서, 요즘에는 '취업이 어렵다'라는 것이 마치 특별할 것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 같다. 언젠가 '연민의 산술학'에 관한 기사를 본 적 있다. 하나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의 죽음은 통계가 되어버려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취업을 하려던 수년 전에도 '올해 기업 신규 채용 최저'라는 말이 뉴스를 장식했었는데, 이제는 거의 매해 이 말이 뉴스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르내리는 것 같다. 이런 저성장 시대에 취업이란 개개인에게는 너무나 간절한, 삶이 통째로 걸려있는 일인데 말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의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특히 요즘 시대의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 같이 느껴진다. 세상살이의 고달픔에 대해 생각이 들 때면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다. 



그림에서는 한 상점 안의 모습이 보이는데, 각자의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 정중앙에 불안해 보이는 한 소녀가 보인다. 벽에 붙여져 있는 많은 그림들로 볼 때 이곳은 그림을 팔고 사는 화방으로 추측된다. 착잡해 보이는 그녀의 오른쪽에는 도매상이 그림을 감정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소녀가 그린 작품을 감정 중일 것이다.



소녀가 머리에 쓴 검은 모자와 검정 드레스는 그녀가 최근에 상을 당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결혼반지는 끼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소녀와 옆에 서있는 남동생은 부모를 여의고 서로에게 의지해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처지일 것이다. 


차가운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도매상은 작품에 그리 좋은 금액을 매겨줄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 자신의 그림이 팔지지 않을 것이란 예감 때문인지 소녀는 불안한 모습으로 손으로 손뜨개 실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아래로 힘없이 떨궈진 시선과 불안한 손이 안쓰럽다. 



도매상의 책상 옆에는 그림을 팔러 온 사람이 앉게 되는 의자가 놓여 있지만, 도매상은 그녀에게 잠시나마라도 자리를 권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 그녀 또한 자리에 앉으려는 생각조차 없어 보이며, 덩그렇게 남아있는 의자가 더 휑하게 보인다. 



타들어가는 소녀의 마음과는 달리 가게의 다른 공간들은 다른 세상이다. 화면 왼편의 의자에 앉은 남자와 그 친구는 그림을 보면서 곁눈질로 흘긋흘긋,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발레리나와 이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누구의 다리가 더 날씬한지, 누가 더 이쁜지 비교해 보기 바쁜 모습이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할 일에 빠져 있어서 이 소녀의 걱정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림이 팔리길 바라는 소녀의 간절한 소망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많은 시선이 소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더 안타깝게 만든다.



여기서 더 안쓰러운 것은, 그림에 암시된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소녀가 아마 그림을 팔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저 뒤편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가게를 나서는 소녀와, 그림을 말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소년을 그려 넣었는데, 옷차림은 다르지만 사실은 그림을 팔지 못하고 가게를 나서는 소녀와 동생의 모습이다. 그들은 얼마나 더 많은 가게를 헤매야 따뜻한 빵을 살 돈을 받을 그림을 팔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제목은 그녀의 안타까운 상황을 한 문장으로 만든 것 같은 구절이다. '이름도 없이, 친구도 없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부모님도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과 어린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소녀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에 누군가 기꺼이 돈을 지불할 만큼 명성이 있는 화가는 아니며, 이러한 고통을 알아줄 친구 또한 주변에 없다. 삶이 중심이 흔들리는 가장 위태로운 순간, 외로운 그녀의 처지를 여과 없이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에밀리 메리 오스본이라는 작가로 빅토리안 시대에 가장 성공한 여성화가 중 한 명이었다. 뛰어난 그림 실력과 열정으로 그림을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큰 성공을 이뤄냈던 작가이기도 하다. 로열 아카데미에서 정기 전시회를 열고 자신만의 작업실을 살 수 있을 정도의 큰돈도 벌어들였지만, 그 시대에 화가로서 여성의 한계는 아주 명확했다. 

그녀는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이 될 수 도 없었고 로열 아카데미의 정식 수업도 참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카데미의 선생님들을 설득해서 과외를 따로 받아낼 정도로 열정과 신념이 있었다.) 교육과 일자리의 기회가 여성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 속에는 이에 대한 고민들이 많이 묻어 나오고, 특히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작품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은 화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대한 회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이 그림은 단순히 여성으로서 당시를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한 것만이 아니다. 
그림이 그려졌던 1857년을 전후해서 당시 런던에서는 급격한 산업 혁명의 결과로 여러 면에서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급격한 성장은 어떤 면에서는 노동계급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기도 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무런 복지 정책이 없이 삶의 질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산업 혁명은 계급의 격차를 엄청난 속도로 벌여 놓고 있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적절하고 균둥한 일자리의 기회를 받지 못하는 노동계급들의 삶이란 깨지기 쉬운 유리같이 불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작품의 부제를 통해서 감상자가 좀 더 많은 것을 보기를 원했다.  '이름도 없이, 친구도 없이'라는 서글픈 제목의 부제는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성경 구절로 붙여졌다.


부유한 자의 재산은 그에게 견고한 성읍이 되고 
빈곤한 자의 가난은 그에게 몰락을 가져온다.


'재화'라는 것이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끼칠 수 있는 해악에 대해 경고한 글귀이다. 이 부제는 작가가 단순히 남녀의 차별 하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님을 반어적으로 드러낸다. 


작품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사회를 양분하는 기준 -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남자와 여자, 이러한 모든 극단의 차이들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화면에 나타난 소녀는 작가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과 고난만을 그대로 투영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소녀는 사회의 모든 소외받는 약자 - 수적으로 열세에 있고 강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약해 보이는- 를 대변하는 존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중앙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모습으로 그려짐으로써 약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가장 강한 사람들임을 반어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저런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그런 날, 터덜터덜 힘없는 발거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이런 날에 나는 이 작품 속 소녀의 눈길을 떠올린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세상살이란 참 고달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각박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려는 모든 사람들이 밥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Nameless and Friendless. "The rich man's wealth is his strong city, etc." - Proverbs, x, 151857, Emily Mary Osb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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