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고도 고마운 ‘일상의 힘’ <보이후드>

by 강윤주

1다소 긴 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는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보이후드>란 영화를 봤다. 영화의 미국 개봉일이 2014년 7월 11일, 한국 개봉일이 10월 23일이었던 걸 생각하자면 영화를 상당히 늦게 본 셈이고, 또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야 이 글을 보게 될 독자들을 상정하자면 뒷북치는 영화 소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무려 골든글로브상 3관왕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작품이자 (현 시점에서는)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라가 있는 작품이니만큼 좀 늦게 소개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아니 좀 늦게 아셨다 해도 꼭 다시 찾아서 봐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영화의 소개를 하기로 작심했다.
비행기 안에서 보게 되었다는 말로 글을 시작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안방에서 이른바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어 보기 시작했더라면 어쩌면 감상을 중단했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숨겨 놓은 문장이다. 러닝타임 장장 2시간 46분, 어디 휴게소 가서 가락국수 하나 먹겠다며 잠깐 내렸다 탈 수도 없는 비행기라는 갇힌 공간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진 영화를 굳이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느냐는 질문이 당장 터져나올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끝까지 다 보고나야 그 진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상업영화가 아닌 예술영화 혹은 독립영화를 보려면 그 문법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처럼, <보이후드>를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학습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학습 시간에의 투자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긴다.
이 영화가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사실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 (죄송합니다 감독님) 감독이 주-조연 배우를 비롯하여 모든 스탭들을 12년간 소집해서 해마다 15분 분량의 영화 찍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팀은 그 일을 했다, 아니 해냈다. 무슨 초등학교 동창회 하는 것도 아니고 치밀한 스케쥴 하에 모든 일이 진행되는 헐리웃에서 어떻게 이런 과정이 가능했는지, 나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쨌든 이 과정을 함께 겪어오면서 우리는 주인공 소년 메이슨 뿐 아니라 에단 호크 같은 굵직한 영화배우가 12년 간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혹은 늙어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무엇보다도 3시간여 가까이 이렇다 할 사건 하나 만들지 않으면서 소소한 일상의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일종의 문화권력을 형성한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부러웠다.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링클레이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에단 호크 (주인공의 친아버지) 를 중심으로 바라보게 된 영화 초반부에서는 '아, 사람들은 이래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혼했지만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에단 호크는 아이들에게 볼링을 가르치고 함께 야구를 하며 캠핑도 간다. 알콜중독자로 폭력까지 휘두른 두번째 아버지조차도 아이들에게 골프를 가르치고, 첫번째 아버지 에단 호크가 재혼한 여자의 아버지 (그러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년에게는 할아버지가 되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냥 남인) 는 소년의 열다섯살 생일에 남자다워지라며 장총을 선물하고 사냥을 가르친다. 사람은 아이를 낳고 다시 손자손녀를 갖게 되면서 자신이 잊고 지냈던, 창의적이고 즐거웠던 유년의 시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구나, 그건 아이가 없는 나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었다.
영화는 잔뜩 미국적이고 가족중심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아이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독립적이 되어야 한다고 엄청나게 강조한다. 그렇지만 나는 제목 <보이후드>에 맞지 않게 소년보다는 오히려 소년의 어머니에 시선이 갔다. (아마도 내가 그녀와 유사한 나이의 여자이기 때문이리라.) 소년이 성장할 동안 세 번 결혼하고 이혼한, 그러면서 뒤늦게 석사까지 마쳐서 원하던 대학 강단에까지 선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 기숙사에 들어간다며 짐을 싸러 온 마지막 날 거의 울부짖으며 말한다. "난 내 인생이 좀 더 특별할 줄 알았어! 이제 남은 건 내 장례식뿐이구나!" 그녀가 뒤늦게 밀려온 외로움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자신을 떠나가는 아들이 슬퍼하기는 커녕 들떠 있다는 것 때문에 괘씸해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냥 그 순간 어머니의 허전함이 이해가 됐다. 이렇듯 아마도 관객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위치에서 그냥 아무런 설명 없이 이해되는 인물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소년이나 소년의 어머니, 또한 소년의 누나와 아버지 누구 하나 잘 난 사람 없고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나 스리랑카에서도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누구도 백 프로 착하거나 악하지 않고 약점도 있지만 매력도 있다. 링클레이터 감독이 목표한 바는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몇 달 혹은 1년 간의 촬영을 통해서는 충분히 감출 수도 있는 배우의, 감독의 일상성이라는 것이 12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통해서는 도무지 감출 수도, 위장할 수도 없는, ‘강원도의 힘’을 능가하는 우리 일상의 힘.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일상의 힘 때문에 가정폭력이나 실연과 같은 다소 충격이 센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기도 한다.
우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일상의 무서움과 고마움을 가슴 시리도록 느낄 수 있게 해보는 영화, <보이후드>를 당신의 일상에 권한다.

강윤주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전 서울환경영화제 선임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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