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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믿음 Apr 04. 2020

꿈꾸던 그곳에 왔다.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

우주의 기운이 내게로 몰려온다!


 눈을 질끈 감고 마우스의 스크롤을 내린다. 'ㅈ'자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뛴다. 전형적인 쫄보인지라.. 'ㅈ'이 보이자마자 마우스 스크롤을 재빨리 처음으로 올렸다. "후.."심호흡을 하고 다시 스크롤을 내린다. 이번에는 진짜 볼 거다! 과연.. 내 이름이 있을까?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흔치 않은 이름 두 글자가 보인다.


호x중학교 정믿음 '합격'


 요리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팔청춘(二八靑春), 중3의 나는 우주의 기운을 직감했다. 수동적이었던 지난 16년을 청산하고 이제 꿈을 향한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다. 마침 TV에서는 7성급 호텔 주방장 광고가 나오고 나의 열정에 불을 집힌다. "남자가 무슨 요리사냐?"는 사회적 편견도 서서히 무너지고 요리사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조리고등학교 합격 후 얼마 안 돼서 그 당시 가장 핫했던 셰프 '에드워드 권'의 쿠킹쇼에 당첨되기까지.. 내가 봐도 이상적인 인생의 스토리가 그려지고 있었다.

요리를 시작한 첫 해 2009년, 동경하던 셰프 에드워드 권을 만나다.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의 합격 커트라인 내신은 평균 180대였다. 전문계지만 공부도 잘해야 했다. 요리사는 단순 기능인이 아니라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학교에 취지를 반영한 것이다. 역시 학교 앞에 '한국'자는 아무 학교나 다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내 최초의 조리고등학교, 1인 1 실습이 가능한 국내 최고의 조리시설 그리고 수준 높은 친구들과 유명 호텔 출신의 유능한 선생님들' 모든 것이 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우연처럼 마주한 이 모든 조각들이 분명 나를 성공시키리라 믿었다.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 1학년 짧게 자른 머리의 '나'

 경기도 시흥 외딴곳에 위치한 전국구 학교인지라 재학생 대부분은 기숙사에 거주해야 했다. 나 역시 선택권이 따로 없었다. 2010년 3월의 어느 봄날, 부푼 꿈을 안고 학교 기숙사에 입소했다. 기숙사에 들어간 첫날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선배 몇 명이 기숙사생 전체를 기숙사 2층 복도에 소집했다. 신입생 중 절반 이상은 머리가 길다며 머리를 짧게 자르라고 지적받았다.


"중학교에 비하면 엄청 짧은 편인데.. 아니 자기도 비슷하면서.. 남자는 머리빨인데.." 두발 지적을 받은 2학년 선배는 3학년 선배 앞에서 좀처럼 기세를 펴지 못했다. 선후배의 규율이 엄격해 보였다. 당시 샤기컷, 울프컷 등 남자도 제법 긴 머리가 유행했었는데 우리는 군대라도 온 마냥 머리를 12mm 이하로 짧게 밀었다.


그날 밤 저녁, 짧게 삐쭉 선 머릿결을 만지며 생각했다.


"아, 여기 쉽지 않겠구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매일 아침 등굣길에는 20분씩 서로를 바라보며 인사교육을 받았다. 학교 생활을 하며 마주치는 선배와 선생님 그리고 외부인들에게 반드시 인사해야 했다. 인사 잘 안 한다고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선배들의 개인 호출이 시작된다. 교내외 200m 내에서는 마주치는 누구에게도 로봇처럼 인사를 했다. 반강제였긴 했지만, 인사라는 좋은 습관 하나가 생겼다.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 입학 당시 '교과목 구성' - 출처 한국직업방송

 1학년 때는 한식과 제과제빵, 2학년 때는 양식과 향토 조리, 3학년 때는 고급서양요리, 일식, 중식, 실험조리를 배운다. 주당 최소 9시간에서 최고 12시간, 조리 전문학교 치고는 생각보다 실습에 많은 시간이 배정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리 이론도 배워야 하고 당시에는 대학 진학을 장려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고교 공통과목도 반드시 이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방과 후 학습은 의무였고 1학년 때는 수능반과 기능반을 50:50 일정 비율로 나눠서 수강했다. 2학년 때부터는 진로의 방향성에 맞춰 수능반과 기능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유학을 준비하는 별도의 반도 있었다. 유학반은 별도의 모집이 따로 없었던 것 같은데 아마 어느 정도 있는 집 자제들이나 열성 학부모의 자녀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실습이 비교적 적다는 초반 생각과는 달리 이론 수업과 실기를 병행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전에는 하루 종일 서서 실기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앉아서 학과 공부를 하고, 방과 후에는 보충 수업 및 다양한 과제를 소화해야 했다. 정신은 물론 체력적인 힘이 동반되어야 했다. 학교가 끝나면 녹초가 되는 일이 많았다.  

 



 학교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선배들이 집합 명령을 내렸다. 한 명만 잘못해도 연대책임을 운운하며 기합을 받기 일 수였다.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머리를 박아 봤다. 머리에서 콘프로스트(각질)가 떨어지는 날도 있었다.


하루 종일 실습과 이론 수업을 병행하며 녹초가 되어 왔는데 기숙사라는 안식처에서 조차 완전한 자유가 없었다. "오늘은 집합 안 시키겠지..?" 노심초사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조리는 칼과 불 등 각종 위험요소에 노출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하관계가 엄격하다고 했다. 당연하기에 반기를 들 수 없었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요리를 처음 배운 나로서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요리는 이런 게 당연한 거구나..


 3학년을 다 합쳐 전교생이 720명 이하로 작은 규모의 학교다 보니 소문이 정말 빨랐다. 선후배 규율이 엄격한 조리계의 특성상 잘못을 하면 매장당하기 쉬운 구조였다. 그래서인지 1학년의 전학률과 자퇴율이 높았다. 선배들은 이것이 조리인의 숙명이라고 하니.. 버텨야 한다고 했다. 고된 시간을 버티면 우리도 멋진 셰프가 되는 날이 찾아올 테니까. 모두가 군말 없이 버티니 나도 버텼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지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분명 전국에서 공부도 잘하고, 비전이 있는 학생들을 모은 집단인데 한 학년, 한 학년이 지나갈수록 조리고등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초심이 식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데 점점 머리가 비어 가는 것 같았다. '집단주의' 열정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은 끼리끼리였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의 구조가 고착화되는 느낌이었다.


요리는 서바이벌이다?  일단 버티자?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다?





성실! 봉사!


 매 실습수업마다 우리가 선생님께 하는 인사법이다. '성실과 봉사' 조리의 기본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인사를 중시하는 것처럼 실무도 중요하지만 인간 됨을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는 토착화된 요리사의 퇴폐적 관습 역시 답습하며 배워야 했다. 내가 배웠던 3년은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TV에서 나오는 이면에 요리란 그리 멋있지 않았다. 학년이 거듭될수록 꿈에 대한 확신을 갖기보다는 이 길이 맞나?라는 의문을 품게 됐다. 그 순간마다 버틸 수 밖에 없었던 건, 나만 이런 줄 알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아무 불만 없어보이니까..


근데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생각해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 나는 꿈꾸던 그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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