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가 그렇게 싫었어?"
사정 뻔히 알면서 대표님이 물었다. 나 또한 대표님의 장단에 맞췄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제가 절 돌아볼 시간이 필요해서요."
"왜? 무슨 일인데?"
기자 출신인 대표님은 명확한 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물음표 살인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짤막하게 브리프 했다.
"에구..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너무 이른 나이에 겪었다. 잘 추스르고,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있을 거야."
음 네. 그런데 행복할 일 그게 뭐죠? 그러니까 그동안 불행했으면 행복할 일이 일어나고, 행복했으면 불행할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요.
행복할 일 그런 것까진 잘 모르겠고 나에게는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행위 자체가 고행이다. 착한 사람들은 착하기 때문에 더는 힘들지 말라고, 빨리 쉬게 해주려고 알아서 하늘이 일찍 데려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상무님은 바로 회사 안 옮기고 쉴 거면 마케팅 클래스라도 들으랬다. 지금은 잘 쓰이지도 않는 그런 예전 이론들.. '자기 직원들이나 잘 챙기세요!'라며 속으로 반발했지만 나는 또 시키는 대로 했다. 과제도 내고 시험도 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잤다. 밀린 만화책을 실컷 읽다가 지겨워질 때면 스팀에서 전 세계인들과 뿌요뿌요+테트리스 대결을 펼쳤다.
지난 어버이날, 2년 반 만에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처음엔 이혼 같은 거 왜 하는 거냐고 수치스럽다고 하는 엄마 입장 생각해서 이혼 사실을 숨기고 코로나를 핑계로 친척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송에 변수가 많아 길어지는 바람에 생각보다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랜만에 뵌 외할머니는 안 아팠냐며, 몸에 상처라도 남지 않았냐며 내 옆에 꼬옥 붙어 계셨다.
문득 외할머니는 어떻게 90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살아오신 걸까 궁금해졌다. 할머니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아직 어렸던 부모님도 함께 겪었을 좌우 대립과 변혁기,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건사고들... 행복이고 불행이고 그런 거 상관없이 그저 삶은 사건의 연속이고, 세상에 나온 우리에게 있어, 하나하나 사건으로서의 이벤트를 겪어 나가는 게 곧 살아간다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행복할 일도 불행할 일도 없다.
몇 번 언급했듯이 내 사주팔자에는 관이 없다. 대신에 재(財)가 가득하다. 나에겐 아무 특별할게 없는데 무슨 재물이 가득한 것일까? 계속 곱씹다가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 일지로 생각이 튀었다. 그날, 그 밤 신혼집 앞에서 누나 불쌍하다며 당시의 나만큼 울먹였던 내 동생, 이혼소송이라는 자칫 껄끄러울 수 있는 이슈에도 도움 될 것 없냐며 기꺼이 나서 주었던 친구들, 직장 내 괴롭힘에 함께 화내주었던 동료들..... 나를 무조건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보물과도 다름없는 소중한 존재가 많았다. 이게 바로 내 재산이었다!
언젠가 봤던 영화 '증오'에 이런 대사가 있다.
"추락한다는 건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어떻게 착륙하느냐는 거지."
내가 그렸던 미래는 크게 한번 깨졌다. 여전히 새로운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 보물과도 다름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흐려지지 않도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충만하다. 굳이 나 자신을 위한 목표가 없더라도 이런 이유를 동기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도 되지 않을까?
추락하면서 어떻게든 착륙은 하겠다만 이왕이면 예쁜 자세로 추락하고 착륙하겠다. 여느 때보다 반짝이고 예쁜 자세로. 단순히 무관성, 술미형, 재다녀의 사주팔자를 가진 사람이 아닌 스스로 내린 정의를 더해 반짝이고 예쁜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기록한다.
이렇게 나는 내 타고난 사주팔자를 읽고 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