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미형살

by 정릉밈씨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대신 돈 벌어다 줄 배우자도, 스스로 벌이를 할 수 있는 직장도 없다.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들었는데, 구멍이..... 없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오기라는 걸 부릴 줄 알았던 나는 몇 주 안되어 금세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어쩐지 입사 후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제어 불가능 상태였던 코로나 확산세로 인해 수습이었던 나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회사 사람들은 재택근무 또는 확진 판정으로 병가 상태이기도 했다. 사내 혼밥 시행으로 인해 누구와도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다.

업무는 업무대로 파악이 힘들었다. '우리 조직은 이런 조직이고, 이러이러한 일을 해왔고, 이러이러한 걸 지향해~'라는 식의 설명은 듣긴 했는데 지향하는 것과 소비자가 기대하는 것이 별로 맞아 보이지 않았다. 기존 진행 내역들을 보아도 별로 지향점과 맞는 부분이 없었다.


주어지는 업무량은 상당했다. 그냥 하고 있던 나에게 몇 주만의 사내 출근으로 겨우 모습을 보인 동료가 몰래 속삭였다.

"지금 받고 계시는 일들, 그냥 못하겠다고 하세요.."

바쁘다는 타팀 대신 안 해본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을 때, 되도록 편하게 자문을 구하고자 접선한 해당 분야에 빠삭한 지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 일이 주어지면 안 되었을뿐더러, 일정 말도 안 되고요, 업무 오더에 공유되었어야 할 디렉션들도 빠져있는데요.."


스트레스가 심했다. 연초부터 시작된 이명이 점점 심해져 사람들의 말소리가 묻힐 정도가 되었다. 음식은 삼킨지 얼마 안 되어 게워냈고, 밤엔 잠들기 어려워 뜬 눈으로 아침까지 시간을 때우다 출근했다. 어찌 됐든 가정폭력 피해자인 나는 가끔 심리검사를 권유받는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 '삶에 의욕과 목표가 없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와 같은 질문에..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사실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솔직히 말해서 매우 그렇다고 답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맡기로 한 일은 말도 안 된다고 일컬어지는 일정에 맞춰서 어떻게든 했다. 팀장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냥 다른 데 알아보심 안될까요? 제가 힘들어서 그래요."

처음으로 회사에서 입을 열고 조금 싸웠다. 권고사직이냐는 나의 질문에 팀장은 잘 모르겠다고 하지, 인사팀은 들은 얘기 없다고 하지, 퇴사 일정은 미뤄지려는 데다가 신규 업무까지 주어지려고 하지.. 팀장의 발언을 메신저에 남겨두었던 내역을 보여주고 나서야 권고사직 처리 받을 수 있었다.


트러블이 계속되니까 괜히 운세를 뒤적거리고, 사주팔자를 찾아보게 되었다. 술미형살이란다.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인생에 일종의 형벌이 계속되는 거라고. 남편도, 직장도 없는 무관성에 악운이 끊이지 않는 술미형 팔자. 그냥 이번 생은 쉬어 가는 생으로 생각하면 된단다. 그럼 나는 이 세상에 왜 왔을까? 배우자의 가정폭력, 외도, 결국에는 이혼, 3번의 타인에 의한 퇴사 이 모든 게 무관성 술미형 팔자라서 인가?


사실 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나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닫은 상태였다. 더 이상의 감정적 교류를 하고 싶지 않아 새롭게 만나게 된 동료들과 말을 섞지 않았고, 종말에는 내가 맡은 일, 상품, 소비자에게까지 완전한 정을 주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오기 때문에 한 성급한 이직이다. 내가 발 뻗을 자리를 내준 것이었고, 사람들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주팔자 탓을 하기엔 내가 나 자신을 돌아봤어야 했는데 무작정 버텨오기만 했다. 그래서 다 망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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