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였다면

by 정릉밈씨
Diana, Princess Of Wales (1961-1996)

나의 어린 시절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났던 무렵 뉴스를 통해 전해진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소식이다. 그때는 내가 그분과 같은 일을 겪게 될지는 몰랐고, 그저 순수하게 '세상에 아직도 공주가 있구나. 공주는 역시 정말 정말 예쁘다'라고만 생각했었다.(나중에 이분의 후임이 되는 카밀라 파커 볼스를 보고 '앗! 다른 느낌의 공주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위에 내가 그 분과 같은 일을 겪었다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정말 최악의 불륜 케이스 중 하나를 겪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다가, 결혼생활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찰스 3세와 카밀라 파커 볼스는 처음부터 불륜을 할 생각으로 갓 스무 살의 어린 소녀를 속이고 결혼, 왕실의 꼭두각시로 세워 놓고 결혼 생활 내내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농락했다. 그럴거면 처음부터 둘이 결혼을 하던가, 카밀라랑 결혼함으로써 왕족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이 싫었다면 카밀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던가, 찰스 3세는 정말 욕심 많은 사람이다.


모두가 알 듯이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찰스 3세, 영국 왕실의 기만적인 태도에 저항하다가 이혼, 곧 교통사고로 사망해버렸고, 찰스 3세는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 이제 카밀라 파커 볼스는 왕비이다. 불륜녀 최고의 아웃풋. 내가 살다 살다 카밀라가 왕비가 되는 것을 본다.

그럴 줄 알았다. 찰스 3세와 카밀라 왕비는 애초에 각자의 배우자, 자식들은 아랑곳 않고 자신들의 지위,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던 욕심이 많은 사람임을 이미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애초에 배우자가 King인데 King의 배우자를 Princess Consort(왕자비)라고 부르겠다고 결혼계약을 한 것이 말이 안 된다. 언젠가 고칠 말일 줄 알았다.

이 광경을 하늘에서 지켜본다면 다이애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다이애나였으면 찰스랑 절대 이혼 안 했어. 카밀라랑 사귀건 말건 명예, 지위, 부 다 챙기고 왕비 자리까지 올랐어!"


남동생이랑 얼마 전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이야기를 하다가 다이애나 왕세자비 이야기가 나오자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편의 외도 행각을 눈곱만치도 봐주지도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한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자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약 내 전 남편이 영국 왕실의 차기 왕위 계승자였다면.. 응. 나는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온갖 수모를 참고 견뎠다. 사교계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서 왕비가 되어 카밀라의 입지를 위협했을 것이고, 찰스 3세가 13살 연상이라 먼저 서거할 가능성이 높으니.. 왕대비까지 되어 보였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마지막에 살아남은 사람이 승자인 기록이라고, 실록에 죽은 찰스 3세와 카밀라의 민낯을 철저하게 왕대비인 내 입장에서 기록하도록 압박했을 것 같다. 두 아들,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활용했겠지?


"내가 다 분하다. 윌리엄 왕자가 왕위에 올라 카밀라에 대한 온갖 타이틀을 박탈하고 궁에서 내쫓아 '과인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아들이다'라고 정조 코스프레 했으면 좋겠다!!"

내가 계속 대리분노를 하자 동생이 말했다.

"누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애초에 내 배우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모든 관계를 끊고 정리하겠어. 부? 명예? 그게 뭐가 중요해. 사랑이 없는 관계를 지속하는 인생이 의미가 있어? 나는 누나 생각하는 방식에 너무 놀랐어."


이미 깨진 유리조각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모으고, 붙여보려 안간힘을 쓰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방식이나, 유리가 깨졌건 말건 아랑곳 않고 '어쨌든 이건 좋은 유리에요'를 우기는 나의 방식이나.. 동생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나는 확실히 가슴보다 머리가 먼저 반응하는 타입이긴 하다. 나나 다이애나 왕세자비나 진짜 사랑이 뭔지 잘 모르나? 혹시.. 다른 사람들은 진짜 사랑이 뭔지 알고 사랑을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유의미한 관계만을 지켜나가겠다는 내 동생은 가족들에게 곧 결혼 준비를 하기 시작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고, 나는 동생과 예비 올케를 지켜보며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 ;^)


Princess Diana Interview ⓒ BBC
There were three of us in this marriage, so it was a bit crowded.
(이 결혼은 셋이서 한 결혼이라 조금 붐볐어요.)


이혼의 결정타가 된 BBC 인터뷰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덤덤하게 말한다. 슬픈 이야기를 덤덤하게 말하는 것은 이제 괜찮아져서가 아니라 마음이 계속 아플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도, 내일모레도.


내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였다면 많이 다른 방식을 선택했겠지만, 이젠 됐다. 타이틀, 사랑, 그런 것들은 영국 왕실에서 골아프게 생각할 몫으로 남겨 두고, 하늘에서 그저 다이애나 스펜서로서 자유와 안식을 얻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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