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세끼..."
입에서 욕이 뿜어져 나왔다. 함께 동행한 친구는 내가 웃기는지 옆에서 깔깔 웃었다. 어느덧 공연 시간보다 1시간이 훌쩍 지난 상황이었다. 비욘세 대신 등장한 스태프들은 8시 공연인데 8시부터 나타나 동선, 조명, 효과장치를 체크하고 있었다.
1~2년에 한 번씩 놀러 가는 미국인데 해가 갈수록 치안이 나빠짐을 느낀다. 현지인들이야 자가용이 있으니 귀가에 아무 문제가 없겠으나 관광객인 나는 다르다. 늦은 시각 시애틀 밤거리를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이 된다. 나는 늦어지는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적용해 가며 귀가를 어떻게 할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이 시점부터 비욘세가 늦게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 시간만큼의 공연을 끝까지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기껏 시간과 큰돈을 들여 멀리까지 왔는데.. 무례한 월드 스타의 갑질에 분통이 터졌다.
기다리며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구글에 '비욘세 지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7월 시카고 공연에서의 지각 논란에 대한 트윗들이 검색되었다. 이 여자, 지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시간에 칼 같기로 유명한 독일에 가서도 지각했다. 마돈나의 경우 공연에 상습 지각하다가 어떤 팬에게 고소까지 당한 적도 있다. 상습 지각은 우울증의 한 증상이라던데..... 씁
밤 9시가 좀 넘어간 시각,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으로 치장된 웬 골든 레이디가 나타났다. 비욘세였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아름다운 골든 레이디의 모습은 마치 <벼랑 위의 포뇨>에서 칠흑 같은 바다에 엄청난 위압감과 함께 나타난 포뇨의 생모를 보는 듯한 기분을 갖게 했다. 공연 일자, 시각을 바꿔놓고도 지각까지 한 주제에 사과 한 마디 없이 뻔뻔하게 웃는 비욘세는 참으로 우아했다. 방금 전까지 화가 엄청났었는데, 그 아름다운 모습에 내 마음이 홀려 버렸다.
비욘세. 스스로 자신이 멋지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그만큼 멋대로 구는 여자다. 별 힘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엄청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며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는 눈짓, 살짝 짓는 미소는 이 공연에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 지각 이슈를 덮어버릴 실력이 있다는 것을 반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퍼포먼스에 대한 준비가 탄탄했다.
앨범 Renaissance의 곡을 대부분 선보인 것은 물론, 그 수많은 히트곡들 사이에서 앨범 Renaissance에 어울리는 곡들만 선별하여 세트리스트를 구성하였다. 투어 콘셉트에 맞춘 편곡도 돋보였고, VCR도 무대에서 어떻게 구현될 것인지를 생각하여 짠 영상들이었다. 상상력과 기술력이 참으로 놀라웠다. 이런 연출을 하다니 그녀가 얼마나 치열하게 정상의 자리에 올랐는지 실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현재의 K-POP 씬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욘세의 공연을 보고 곱씹어보니 내가 현재까지 경험한 K-POP 공연 세트리스트에서 기승전결을 읽어본 적이 없다. 킬링 트랙, 킬링 퍼포먼스의 나열이고, VCR의 경우 공연의 주제나 투어 콘셉트와는 관계없는 (다인원의 그룹이라면) 특정 멤버·인물을 예쁘게 조명한 영상들뿐이었다. 스토리 라인이 없었다. 한 마디로 알맹이가 없다는 얘기이다. K-POP 정말 좋은 음악 맞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예쁘장한 얼굴, 언제 어떤 팬이 볼지 몰라 항상 발라야만 하는 인성, 자컨에 최적화된 매력적인 성격.. 그런 것들을 참 덧없게, 한낱 껍데기로 만들어 버리는 실력파의 공연이었다. 알맹이가 꽉 차다 못해 상습 지각을 하는 건방은 좀 안타깝지만, 저어기 멀리 앉은 플로어석의 관객까지 휘어잡는 아우라의 소유자라면 그럴 만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