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job설

핏빛에서 흰빛으로

하얼빈을 읽고, 하얼빈을 보고

by Mr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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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끝을 아는 이야기이다. 끝에는 주인공이 죽는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안중근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없다. 그런 안중근을 나는 김훈의 하얼빈에서 읽었다. 영화 하얼빈에서 나는 안중근을 보았다. 읽은 안중근과 보는 안중근이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김훈의 하얼빈은 적막했다. 친절한 설명이 없었다. 특히 안중근이 왜 이토를 죽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서술이 부족했다. 이토를 척살하고 말겠다는 그 굳건한 의지, 결연한 행동은 국권을 뺏긴 자의 분노 정도로만 서술될 뿐이다. 안중근이라는 개인에게 그 분노가 어떻게 차올랐는지는 희미하다. 안중근은 이토 암살을 위해 다만 저벅저벅 전진할 뿐이다. 그의 총구는 차분하다. 총알은 성실히 나아간다. 이토는 하릴없이 죽는다. 이토가 숨이 끊어지고 나서야 공판장에서 그 척살의 이유가 말로 나타난다. 일본인 수사관의 교묘한 덫을 안중근은 담백한 진실과 순수한 의지의 힘으로 부수며 나아간다.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의 척살의지를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이 기울자 안중근은 대한의군의 일원으로 일본군을 공격한다. 차가운 눈밭을 뒹굴며 일본군을 습격하고 ‘목을 따는’ 잔인한 장면, 그 과정에서 스러져간 동지들의 주검을 자세히 비춘다.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풀어주냐 마느냐는 문제로 안중근은 동료들과 설전을 벌인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를 석방한다. 이 결정은 일본군의 추격과 동료들의 허망한 죽음으로 되돌아온다. 먹을 것을 찾아 마을에 내려갔던 안중근은 일본군 습격을 피해 목숨을 건진다. 동료들의 죽음이 허망한 만큼 그가 목숨을 건진 이유도 허망하므로 안중근은 동료의 죽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안중근은 동료들 앞에 다시 나타나 이토 척살 계획을 밝힌다. 그리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다. 이제 그는 이토를 죽여야만 한다. 그의 의지는 동료들을 움직인다. 그 의지는 말 위에 올라 만주의 사막을 건너고, 만주의 철로를 거쳐 러시아의 하얼빈에 닿는다. 총알이 이토의 숨을 끊은 후 그의 전투는 종료되었다. 그의 말도 끊긴다. 책과 달리 공판과정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안중근은 처형장의 계단을 올라가고 올가미가 목에 걸리기 전 뒤를 돌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어둠이 내린 처형장에서 안중근은 어머님이 지어주신 하얀 한복을 입고 서있다. 캄캄한 처형장에서 한복은 빛을 뿜어낸다. 그 빛은 그의 승리를 상징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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