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팔자가?

한국 근대 수필 산책 3

by 김태진

― 계용묵의 <수상록〉을 읽고


인간이란 참 단순한 것 같습니다.

눈가 주름 하나에도 팔자가 보이고, 머리숱 줄어든 데서 앞날을 점치려 드니까요.

계용묵의 수필 〈수상록〉을 읽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목부터가 요즘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수상록(隨想錄)’이라니, 지금 말로 하면 그냥 ‘즉흥 에세이’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면, 1939년에 쓰인 글인데도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도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궁금해했습니다.
“내 얼굴은 과연 복이 있는 얼굴일까요?”
결국 그는 관상가를 찾아갑니다.

기승전결만 놓고 보면 구조는 단순합니다.

: 얼굴에 팔자가 드러난다는 세간의 믿음을 던지고,

: 자기 얼굴을 궁금해하며 거울을 들여다보고,

: 관상가에게 들은 황당한 진단 ― “문필을 버리고 장사를 하라. 벼 이천 석은 거뜬하다.”

: 하지만 나는 문필을 버리지 않겠다.


대가이시니 글의 기본 구조도 좋은 교본입니다.

그런데 계용묵은 단순히 이야기를 기승전결로만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정의 곡선을 교묘하게 짰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곧 기대감을 심어주다가, 관상가의 말에 분노와 당혹을 터뜨리게 하고, 마지막엔 자조 섞인 웃음으로 마무리합니다. 마치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읽는 내내 킥킥 웃다가도, 끝에 가서는 거울 속 내 얼굴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관상가의 말은 참 기가 막힙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글을 버리라”니요. 만약 제 얼굴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글은 접고… 치킨집이나 하시죠?”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라면도 못 끓이는 데? 할지요!


그런데 저자는 웃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갑자기 밉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문필가의 얼굴에서 문필의 재주가 안 보인다니,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말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그 아이러니 속에서 오히려 저자의 고집이 빛난 것 같습니다.

“나는 문필을 버리지 않겠다.”

장사하면 돈은 벌 수 있을지 몰라도, 글 쓰는 즐거움은 돈으로 바꿀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 고집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그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장사로 이천 석을 쌓았더라면, 이름도 글도 남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글을 지켜낸 덕분에 계용묵은 2025년의 우리 앞에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도 세상은 관상가처럼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스펙을 쌓으라, 외모를 가꾸라, 재산을 늘리라.”

번듯한 학벌, 반짝이는 프로필 사진, 숫자로 환산되는 팔로워 수가 현대판 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상? 지금으로 치면 AI 운세 앱이나 타로카드쯤 될까요.) 그럴듯해 보여도 실제 삶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잘난 조건에도 무너지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도 빛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결국 관상은 얼굴에서 이력서로, 점괘는 SNS로 옮겨왔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수상록〉을 덮고 나도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평범한 얼굴. 번듯하지도, 그렇다고 구차하지도 않은 얼굴. 딱 계용묵이 말한 그 얼굴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평범함 덕분에 오히려 어떤 길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굴은 변하지 않지만, 그 얼굴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전적으로 제 몫일 테니까요.


그래서 오늘 아침, 거울 앞에서 저는 이렇게 중얼거려 봅니다.
“관상? 글쎄… 내 팔자는 내가 정해볼까!.”
볼펜을 잡은 손에 괜히 힘을 넣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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