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눌림 피해호소인의 변명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가위에 눌렸다.
여름이어서 문을 열어놓고 잤는데 유리창으로 검은색 연기와 같은 비정방형의 물질이 스물스물 넘어 들어오는게 아닌가?
잠에서 깬 나는 눈을 의심하고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검은 물체는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지만 끝까지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특별히 나를 해칠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저 누워있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이다.
난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날 찾아왔고, 숨도 못쉬게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저승으로 데려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격렬히 저항했다. 몸은 움직이지 못해도 보이는 것만은 잘 보였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책상, 벽시계, 참고서 목록까지.. 숨을 쉴 수 없다는게 제일 답답해서 조금 더 있다가는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귀신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몸의 긴장감이 풀리며 끝났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불을 켰다. 웬걸? 내방이 아니다. 정확히는 내 방이 맞는데 조금전까지 봤던 내방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조금 전에 봤던 내 방의 모습은 예전의 내방이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예전 집의 방. 이상한 것은 그뿐 아니었다. 열어둔 줄 알았던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벽시계는 아예 없었다. 그 시계도 이사하면서 버리고 온 시계였다.
뭐지? 꿈이라고? 이렇게 생생한데?
가위눌림은 계속 됐다. 원래 처음이 어렵지 뭐든 한번 발을 들이면 반복은 쉽다.
강도도 강해졌다. 제일 처음 눌린 가위를 난이도 5로 잡고 평가해보면, 귀신이 보이지 않고 몸만 못 움직이는 정도는 난이도 3, 침대 위로 몸이 뜨는 경험을 했다면 난이도 7, 옆에 있는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해도 들은척도 않고 내팽게치면 난이도 9 (물론 깨어보면 엄마는 없다),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누워있는 날 내려다보는 게 난이도 10이다. (이건 딱 2번 경험했다)
가위가 악몽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놀라고 무서운 나머지 밤에 잠자는 것을 거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야행성이 되었고, 방학때는 아예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했다. 신기하게 낮에 자면 가위 눌리지 않는다.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해도 가위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가위눌림은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난이도는 천차만별이었지만 가위경력 20년이 훌쩍 넘을 때 즈음부터 가위에 눌려도 예전처럼 놀라지 않는다. 그저 올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깨어나려고 노력할 뿐.
심지어 노하우도 생겼다. 숨을 크게 쉰다거나 소리를 지른다거나... (이 소리도 마음의 소리로 끝날때가 많다. 아내는 자는데 방해되는 신음소리 정도라고 증언했다.)
그래도 믿음이 있었다. 가위눌림에서 유체이탈 경험까지 했는데.. 이 정도면 귀신이 있지 않을까? 귀신이 있다면 신도 있지 않을까?
가위눌림이 뇌과학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최근에 알았다.
"가위눌림은 렘수면 상태에서 꾸는 꿈의 일종입니다. 렘수면 중에는 의식영역이 활발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몸을 움직일 수 없죠?"
"렘수면 중에 척수에 있는 전각세포의 작용을 억제하기 때문입니다. 전각세포는 척수에서 근육으로 뻗어 움직임의 명령을 내보는데 명령을 내리지 않는 거죠."
"숨은 왜 못쉬나요?"
"렘수면 중에는 호흡을 느리게 하는 부교감신경이 우세하기 때문이에요."
"환각은 왜 보이는데요? 주로 옛날에 본 것이 보이던데?"
"렘수면 때는 주위로부터 감각정보가 차단됩니다. 반면 대뇌 아래의 '교'라는 부위에서 아세틸콜린이라는 화학물질이 나와 대뇌의 시각영역을 강하게 자극하고, 뇌가 가공의 시각정보를 조작해 입면환각(생생한 환각)을 만들어 냅니다."
"좋아, 마지막 질문. 그럼 왜 즐거운 환각은 안 나오고 맨날 나쁜 것만 보이지?"
"렘수면 때 뇌의 작용을 보면 대뇌 편도체의 혈류가 늘어납니다. 편도체는 일반적으로 공포의 감정과 관련돼 있습니다. 렘수면 때 활발해지는 편도체와 대뇌의 다른 영역이 협력해 무서운 꿈을 만드는 겁니다."
"헐, 당신 챗gpt지?"
이렇게 꼼꼼하게 가위눌림을 설명하다니 실망이었다. 더구나 유체이탈도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두정엽과 측두엽 사이에 전기충격을 가하면 인위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 올라프 블랑케 박사는 피험자가 원하면 가전제품을 켜고 끄듯이 스위치 하나라도 유체이탈을 경험시켜 줄 수 있다고 했다고.
도무지 뇌과학은 안 그래도 각박한 현대사회에 낭만이 사라지게 하고 있다. 가위눌림 > 귀신 있음 > 신도 있음, 공식이 무참히 깨진 것이다.
좋은 점은 뇌과학을 접하고 난 후 더이상 공포영화가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저거 뭐, 다 두뇌가 장난치는 거네. 인간을 가지고 노네.. 뭐 이러면서 영화를 본다. 또한 어떤 무서운 상황에서도 귀신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무섭다.
한발 더 나아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스산한 기분이 들면 기대치가 높아진다. 그래 한번만 보여라. 귀신이 있다면 신도 있는 것이니까. 신이 있다면 희망이 있으니까. 그럼 매일 기도할텐데. 도와주시라고.
제일 두려운 건, 신이 있어도 인간에게 무관심한 겁니다. 혹은 인간을 미워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