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창업, 결혼,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정신 팔리지 않기를 바란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없이 맞이하길 바란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주길 바란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수학연맹에서 수상하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말이다. 수학자라더니, 시인인가?
역시 천재들이 보는 이 세계는 다른 모양이다. 사회성이 결여돼 대화할 때 자신의 구두코를 보면서 말하면 수학자라고 하면서, 그의 문장 하나하나에 인생에 대한 통찰이 아름답게 녹아있다.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잘 살면 얼마나 더 잘 산다고, 그 좋은 머리를 고작 1인실 병실에서 죽으려고 쓰나?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했던 하이데거의 철학과 닮아 있다.
수학은 아름다운 학문이다. 우주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수학으로 쓰여져 있을 것이라 했다. 수학자의 눈에 이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아름다울까?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라니... 꼭 나에게 건네는 조언같다. 의미도 폭력이고, 무의미도 폭력이다. 의식과 이성에 대한 폭력이다. 내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의미'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게다가 나의 하루는 경험의 대상이지, 소진의 대상이 아니다. 삶의 마지막에는 오직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 삶의 의미는 과정과 경험에서 찾아야 한다.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인생의 종착지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 죽음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는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고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란다. 어차피 우주의 긴 역사에서 보면, 나의 인생은 '일시적'이다. 짧은 인생이지만 온통 불확실성으로 범벅돼 있다. 만약 뻔히 알고 있는 인생이라면, 기쁨과 환희가 있을 수 없다. 이토록 절절히 아프고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다.
수학자의 세계는 수학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수학은 불변하고, 확실하고,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를 가지고 있고, 체계 자체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도 없다.(괴델, 불완전성의 정리)
드넓은 우주에, 반짝이는 숫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세계를 떠올려보자. 아름답지 않나?
시간의 가장 짧은 단위를 나타내는 플랑크 시간은 10의 마이너스 43승이다. 수학이 아니라면 이 짧은 순간을 어떻게 표시할 것인가?
수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자체가 확실하고 영원해서 아닌 것 같다. 불확실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사소하고 일시적인 것들도 드러내주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