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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27. 2024

인간성의 한 연구: 아비투스와 페르소나

운전하다 대책없이 끼어드는 차를 보고 무심코 뱉은 말, 거참 무례하네. 

옆자리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아내는 '무례하다'는 내 말에 한마디 했다.

"요즘 누가 그런 말을 써? 그러다 꼰대 소리 듣는다."

"...?"


언제나 맞는 말만 하는 아내를 믿고 나를 의심했다. 그럼 욕이라도 했어야 했나? 아니면 저 정도는 무례하지 않은 건가? 경쟁사회에서 도로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잘가는 차선으로 쭈욱 오다가 내가 빈틈을 보이니 그 앞에 쑤웅 끼어드는 것인데, 누굴 패는 것도 아니고 사기 치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가 루저?


무례를 무례라 부르지 못하고 사람의 인간됨을 말하지도 못한다. 힘 있고 목소리 큰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라면서 유튜브든 어디든 마구 떠드는데 나는 점점 더 표현의 자유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말만 하면.. ㅠㅠ

 


사람 안 변한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변한다'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다. 변하려고 노력하고 꽤 상당기간 변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변하는 것이라면 사람도 변하고 고쳐 쓸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원초적으로 분자 상태까지 모두 바꿔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그건 당연히 안 변한다. 사람만 안 변하나? 그런 식이면 모든 물질이 근본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핵분열이나 핵융합이면 몰라도. 


절대 내 이야기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의 옆집 사람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결혼할 당시에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한다.


"결혼해 보니까 내가 사실 지금 성격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면 어떻게 할래? 좀 나쁜 쪽으로."

"그럼 지금까지 날 속인거?"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우리가 3년 쯤 사귀었는데 그럼 3년이나 속인거네?"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내가."

"그럼 얼마나 더 속일 수 있는데?"

"글쎄, 최대한 하면 3년은 더 속일 수 있을 듯. 그것도 너니까 가능한거야."

"내가 둔하다는 거야?"

"아니고, 널 속여서라도 함께 하고픈 마음이랄까?"

"흐음. 3년 받고 3년 더. 그 다음은 맘대로 해."

"진짜?"

"응. 내 생각에 3년 속였으면 평생도 속일 수 있다고 봐. 그러니까 속아줄게. 나도 너니까."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여러 역할극을 하게 돼 있다. 직장에서는 쿨한 선배, 집에서는 다정한 남편, 아들에겐 꼼짝 못하는 바보, 혼자 있을 때는 우울한 철학자, 술 마실 때는 고양이 등.

이렇게 상황에 맞춰 자신의 성격이나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그리스 시대의 가면극에서 가면을 바꿔 쓰는 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만들어진 개별 인격을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정리하면 누구에게나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있는 것이다. 


가끔은 자신의 페르소나에 너무 열중해 진실된 자아와 충돌과 갈등이 생긴다. 부여된 역할이 가중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을 경험하고 심하면 공황장애가 온다. 이게 페르소나 증후군이다. 가끔 메소드 연기에 출중한 배우들이 배역이 끝나도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부적응을 겪기도 하는데 이것도 페르소나 증후군의 일종이다.  


배우가 아니라 일반인도 페르소나 증후군을 적잖게 겪는다. 내가 되어야 하는 남편, 내가 되어야 하는 직장상사, 혹은 남친이나 아들 등 나를 부르는 모든 호칭에서 파생된 인격에 열중하다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페르소나가 아닌 '자아'는 무엇인가이다.


요즘 종종 듣는 질문이 '너의 아비투스가 뭐냐?' 이다. 아비투스는 습관을 뜻하는 habit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 Habitus를 알파벳대로 읽은 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조금 더 심오하다. 

움베르트 에코는 아비투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상류층 행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 구분이라는 것은 아주 잔인한 메커니즘이다. 졸부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하더라도 자손 대대로 물려받은 촌티를 벗어버릴 수 없다. 그는 생선용 포크와 나이프를 구별할 줄 모르며, 자기 소유의 페라리 유리창에 원숭이 인형을 매달아둘 것이고, 전용 제트기의 계기판에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의 조각상을 올려 놓을 것이다. 그 때문에 졸부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게르망트 공작부인 같은 고상한 사람들에게서는 절대로 초대를 받지 못한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가공인물인데 프랑스 사교계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한 사교계의 여왕이다. 


다시 말해 아비투스는 한 사람이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속한 채 수십 년을 살면서 형성된 개인의 천성을 일컫는다. 흔히 천성은 못 버린다고 할 때 이 천성이 아비투스와 유사한 개념이다. 그러면 나의 아비투스는 나 자신(자아)일까? 이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나 자신은 무엇인가? 그게 뭐라고, 그리 애틋하고 소중해서 정체성의 혼란까지 초래하는 것일까? 


영화 <킹스맨>에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여기서 매너로 만들어진 사람은 페르소나가 아니라 아비투스에 가깝다. 한발 너 나아가 개인의 인간성은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상당부분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만들어진 인격이 아비투스가 된다. 


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의 의미는 만들기 나름이라는 것이고, 개인은 자신의 인간성에 대해 책임을 가져야 한다. -나고 자란 환경의 영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결정론에 따르면 환경의 영향 역시 상당하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성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냥 하고 싶은대로 살아서는 인간됨을 실천하기 어렵다. 


후학으로서 공자님 말씀은 빠트리지 않고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현대에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구절이 있다.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나이 70이 되니 마음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 이건 공자와 격이 맞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신체와 함께 절제하는 정신도 약해져서 무례하기 쉽다. 나이 들수록 마음을 따르지 말고 매너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내가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남들의 무례를 탓하는 이상으로 매너를 지키고 인간성을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인간성은 만들어지고 있고 미래의 내 아비투스가 된다. 

진정한 나 자신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 시간 이후 내 아비투스는 온전히 내 탓이다.  

자존심 때문에 환경 탓은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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