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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l 02. 2024

오늘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

나는 오늘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철저하고 냉혹하게 '하고 싶은 것'만을 하기로 정했다. -자유를 위해서는 가끔 냉혹해져야 한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가족일지라도!

이건 일종의 실험이자 휴가였다. 매사 할 일을 정해두고 심지어 메모를 하고 빠트리지 않게 노력하며 살았다. 수없이 많은 나날을 그런 식으로 살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으나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무척 다행이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여유 또는 공간이다. 내 삶은 너무 빡빡하다.


"What is is, what is not is not."


철학과에 입학해 첫 서양철학사 수업에서 교수님은 칠판에 이 문장을 적고 해석해 보라고 하셨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유명한 파르메니데스가 한 말이라는데.. 우리 중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뜻을 듣고 나니 그제서야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교수님은 해석 대신 또 다른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날으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


소피스트로 유명한 제논이 한 말인데, 이 문장과 파르메니테스의 말을 연관지어서 리포트를 써오라는 것이었다. 있는 것이 있는 것하고 날으는 화살이 정지해 있는 것과의 연관성. 물론  그 중간에는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 열쇠였다. 아무도 못 맞췄지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동어반복으로 두 문장. 완전히 참인 명제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이 세상에 void가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세상이 있는 것으로 가득한데 어떻게 공허가 있겠느냐.. 보기에 비어있는 것처럼 보여도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없는 것은 없으니. 

세상이 가득 차 있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운동이 불가능하다. 사람이 꽉 찬 지하철에서 꼼짝도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날으는 화살도 정지해 있다고 비꼰 것이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내 일상에 빈틈이 없어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니 오히려 부족함을 느낀다는 말을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공허가 없으니 공허가 그리운 상태라고 할까?   


"인간의 모든 불행은 홀로 조용한 방에 머물 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사실에서 비롯된다.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내 영혼 속에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 파스칼, <팡세>

 

맞는 말씀이다. 내 영혼은 고독과 침묵이 필요하다. 그래서 휴가를 냈다. 내일 나의 휴가는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 아내에게도 선언했다. 나는 내일 휴가야. 남편도 아빠도 가장에서도 휴가!

딱 여기까지 성공했다. 


지금 시각 오후 6시29분. 내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중이다. 

1.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찾지 못했다. 운동은 해야 할 일인가? 밥 먹는 건? 면도는?   

2. 조금이라도 흥미가 떨어지면 읽던 책도 던지고 보던 영화나 드라마도 끄기로 다짐했다. 절대로 보고 싶은 콘텐츠만 보기로 했다. 거의 누워서 웹툰만 정주행 하리라 다짐했다. 이건 어느 정도 성공했다. 

3. 홀로 조용히 방에 머무는 것은 방금 음악을 틀면서 조용히 하길 실패했다. 내 우주는 침묵하길 싫어한다.

4.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오늘은 절대 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철저히 콘텐츠를 소비만 하고 창작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하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하고 점검하기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는 아이러니. 


중독인가? 생각중독 때문에 생각을 멈추는 법을 모르고, 하루라도 글 쓰지 않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이제 생각났지만 나는 오늘 오전에 이미 장문의 일기를 썼다. -이건 글쓰기로 치지도 않는 것이다. 

중독이 확실하다. 물을 안 마시면 사흘을 견디지 못하니 물 중독이고, 숨을 안 쉬면 5분을 넘지 못하니 산소 중독이다. 내 글쓰기는 물 중독, 산소 중독과 같은 선상에 있다. 

고백하자면, 

내 글쓰기는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멈추지 못한다. 내 인생도 그렇다. 아무 소용 없는데도 기어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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