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다. 그건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다."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카뮈가 이렇게 말했다.
수학과 물리학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공대를 때려칠 때, 그리고 망설임없이 진로를 철학과로 재설정할 수 있었던 것은 카뮈의 이 구절 때문이었다.
꼬맹이 시절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되물었던 질문, '왜 살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에 가서 일타스님을 처음 뵀을 때도, 그분의 제자인 해국스님께 가르침을 받았을 때도, 유명하신 법정스님을 만났을 때도 내 질문은 언제나 이게 먼저였다.
"왜 사는 겁니까?"
그중 누구의 대답인지는 기억나지는 않지만, 많은 말씀 중에 남은 것은 하나다.
"가슴에 화살이 박히면 '왜'를 생각하지 말고 먼저 뽑아야 한다."
고승들이 내려준 선문답 치고는 무척 쉬운 퀴즈였음에도 이 뜻을 아는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철학과에 가면 모든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붕어빵에 붕어가 안 들었듯이, 철학과에 내가 알던 철학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알던 철학은 철학이라 할 수도 없었다.
서양철학사에서 시작해, 논리학, 인식론, 데카르트, 경험론, 버클리, 언어철학, 분석철학, 과학철학, 그 어느 과목에서도 '왜 사는지'에 대한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묻지도 않았다.
이유는 확고했다. 철학은 올바른 질문에서 출발하는데, '왜 사는냐?'는 질문이 잘못된 것이었다. 질문의 형식부터 지시하는 내용까지 모조리 다 잘못된 질문이었다. -비트겐슈타인에서 내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됐다.
사서삼경과 노자와 장자, 순자, 성리학을 배웠던 동양철학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한문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버거워서 제대로 묻지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마 공자나 노자의 말씀에 답이 있었을 듯도 한데.
가장 기대했었던 형이상학 과목에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10분의 1 쯤 강독하다가 끝이 났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배울 기회도 없었다. 과목을 개설한 교수님이 없었고 우리끼리 공부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공부 좀 한다는 학우들과 절반쯤 읽다가 포기했다.
심지어 선배들은 니체는 '사파의 학문'이라며 가까이 할 생각을 하지 말고 교수님께 묻지도 말라 했다. 그때는 그랬다. 요즘처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같은 책을 끼고 다니다가는 허리가 꺾이는 분서갱유와 유사한 비극을 겪을 수도 있었다.
내 선택은 늘 오답이었다. 항상 질문이 잘못됐고, 당연하게도 옳은 답을 구할 수 없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존재'라고 말했고, 비트겐슈타인과 샤르트르 등은 '죽음은 상상할 수 있겠지만 결코 경험할 수 없다'고 한계 지었다. 또 니체는 '죽음을 생각하느니 삶을 열번 더 생각하라'고 충고했다.
'왜 사나?'는 질문은 삶의 반대쪽에 죽음이 있으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었기에 첫 번째 오류가 있다. 일방통행과 같이 우리는 삶을 경험할 뿐 죽음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죽음은 선택이 아니다. 자살한다고 해도 자살까지 이르는 여러 방법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죽음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으며, 임사체험과 유사한 경험을 한다고 해도 죽음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경험할 의식과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은 간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고 아예 앞뒤가 맞지 않는 오류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질문이 '왜 사나?'이다. 이 질문은 또 '삶에 이유가 있다'는 전제를 감추고 있다. -많은 사실(사건)에 이유가 없다.
그래서 간단해 보이는 질문에 비해 대답이 어렵고, 불가해하다. 그러니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내 스스로 질문의 잘못을 깨닫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면, 역시 철학자인 카뮈는 왜 저런 말을 했던 것일까?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보자니.. 그러다가 가치없다는 판단이 나오면 어떻게 할건데? 다 같이 죽자고? 모르겠다.
막연히 짐작해 보건데 카뮈는 무의미해 보이는 인생에서 '살만한 가치'를 찾아보라고 요구한 것 같다. 이쑤시개로 죽을 때까지 호랑이를 찌르는 것처럼, 또는 냉장고에 코끼리를 될때까지 집어 넣는 것처럼,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의미를 찾는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 아닐까?
그렇기에 카뮈는 이렇게도 말했다.
"우선 삶을 선택하자."
정상에 가져다 놓으면 도로 굴러떨어지는 바위 덩어리를 또다시 밀어 올리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부조리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살아가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삶'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바보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살까?
정상에 가져다 놓으면 도로 굴러떨어지는 돌멩이가 나에게는 이 질문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