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내 가슴이 슬픔으로 충만할 때, 그리고 그것이 내 생각을 사로잡을 때, 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슬픔이 너무 깊고 압도적일 때는,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몽테뉴, '슬픔에 대하여'
전장에서 죽어 돌아온 아들의 시체를 보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어느 귀족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람은 너무 슬퍼도 슬픔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가 슬퍼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쓸 수 있는 어휘가 제법 많아졌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점점 많아진다.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는지 설명할 수 없고, 미칠 것 같은데 왜 미치는지 분석하기 어렵다.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납득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나한테 화를 내는데?"
"너한테 화내는 게 아니야."
"그럼 왜 화났는데?"
"나 때문에?"
결국 모든 원인은 어설픈 '나'에게 귀속된다. 그럴 듯한 원인을 찾지 못하니 일단 내탓을 한다. 남탓을 해봐야 끝이 좋지 않고 뒷맛도 별로다. 그냥 내탓을 하고 자책하는 게 그나마 나은 처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오답이다.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해서 스스로를 탓하고 곱씹다보면, 뭘 해도 내탓이고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상태, 즉 우울감에 빠진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처음에는 그저 의식의 변덕에 불과했던 우울감이 생리학적 증상인 우울증로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정신적 현상이 물리적 현상으로 전이되는 비논리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가설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단순 우울감이 지속되다가 생리학적 증상(우울증)으로 변이되는 순간 심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 우울증에서 헤어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전문가의 도움과 치료가 필요하다. 두뇌의 어느 부분이 고장난 것이고 물리적으로 사고회로가 손상된 것이어서 '마음의 평화' 같은 자가치료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뇌과학에서 조울증은 좌뇌와 우뇌의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긍정적인 감정은 좌뇌에서 느끼고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좌뇌가 손상되면 우뇌의 기능이 활발해져 우울감에 빠져든다. 일부 과학자들은 두뇌의 복내측피질이 손상되었을 때 조울증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어느 경우든 우울증이 단순한 심리 상태와는 다른 심각한 질환임을 알려주고 있다.
무서운 일이다. 우울증과 비슷한 정신적 질환에 걸렸을 경우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다니.. 내 마음을 내 맘대로 못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어디 있을까? 슬퍼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내가 '나'일 때 이야기다. 나를 벗어난 어떤 것이 두뇌의 변덕에 따라 슬퍼하고 화를 낼 것이라 가정하면 그것만큼은 꼭 막고 싶어진다.
대부분의 것들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망자가 건너는 '레테의 강'과 같이 일단 건너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우울감과 우울증 사이에도 그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자력구제는 힘들어진다. 잘 보이지 않아도 스스로를 자주 돌아보면 느낄 수 있다.
'이거 위험하다! 나는 나를 너무 괴롭히고 있어!'
그래서 농담 같은 말이 나온다. 정신줄 놓지마!
그러나 농담이 아니다. 정신줄 놓지마!
정신줄이야 말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마지막 구명줄이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