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sy Jul 12. 2024

내 안에 나 있다. -3-

여인 2

내 마음은 근사한 프랑스 레스토랑에 가서 2시간에 걸쳐 천천히 나오는 코스요리를 먹고 싶었지만 그녀는 한식을 고집했다. 게다가 정확하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점을 골랐다. 


“여기는 그냥 밥 먹는 곳인데.”

“밥 먹으러 왔잖아요.”

“그 밥이 밥이 아닌데.”

“밥이 밥이죠.”


처음부터 그녀의 페이스에 말렸다. 의견이 조금 달랐다가도 그녀가 한마디로 정리하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크림 좋아하죠?”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이정씨가 먹고 싶은 디저트를 고르는게 어떨지 싶은데요.”

“나도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어디로 갈까요?”


이런 식이었다. 처음 만났는데도 처음 같지 않았다. 대화의 주제도 다양했다. 음식 이야기, 영화, 연예인 이야기, 심지어 국내정치까지, 인공지능을 비롯한 IT트렌드도 빠지지 않았다. 


“그럼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네, 여행이라는 표현은 좀 억지가 있지만.”


시간여행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만약에 말이에요. 양자컴퓨팅이 더 발전하면 인간의 의식만 과거로 보낼 수 있을까요?”


이정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려운 질문도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하는 텀이 길었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이.


“역시 아니군요.”

“뭐가요?”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요.”

“혹시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어요?”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같은 마음인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는 뜻일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기분이 그래서. 오늘 즐거웠어요. 중요하게 할 일이 있었는데 까먹었지 뭐에요. 우리 다시 볼 수 있죠?”


그렇게 첫 만남이 끝났다.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연락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성공이다. 이런 기분 얼마만일까? 대학교 이후 처음이었다. 첫 사랑도 워낙 시들해서 그게 사랑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뒤로는 여자도 그냥 젠더가 다른 사람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무성애자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는데.. 아, 다행이다. 나는 여자가 좋아. 아니 이 여자가 좋아. 



-그렇게 그녀가 마음에 들어?


거의 24시간 동안 잠수해 있던 K가 깨어나 처음 한 말이었다.


“뭐야? 어디 휴가라도 간 거야? 난 완전히 미래로 돌아간 줄 알았잖아.”

-가긴, 어딜 가. 그냥 좀 피곤해서. 어땠어?

“누구? 이정? 아, 못 봤겠구나. 사진 보다 낫더라. 똑똑하고 배려심 넘치고, 무엇보다 나랑 취향이 비슷해. 음식 취향도 같고.”

-그렇겠지. 그보다는 건강해 보여?

“뭔 영감 같은 소리를. 당연히 건강하지.”

-그럼 다행이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결혼이라도 하려고?

“미친 거? 너 나 몰라? 내가 결혼을 왜 해? 그냥 좀 서로 알아가는 단계라고 할까?”

-결혼 안 할 거면 일찌감치 그만 둬. 상처 받는다. 

“상처? 내가? 후후 웃기지 말고, 사실 너도 알고 있었지? 내가 이정 박사 만나게 될 거.”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그렇고. 어제는 왜 그렇게 못 가게 한 거야?”

-..... 별 일 없었으면 됐어. 

“뭐야? 그 난리를 치더니. 상황 종료 된 거?”

-그런 셈이지. 그런데 강동하, 코딩팀 신지우는 어떻게 할 거야?

“신지우 대리? 신지우가 왜? 무슨 일 생겨?”

-넌 아직 그녀가 너 좋아하는 거 모르지?

“신지우가 날 좋아해? 그럴 리가. 전혀 아닌데.”

-하긴 이 시기에 넌 모를 수도 있겠다. 신지우 정말 괜찮아.

“지금 이거 무슨 뜻이지? 설마 내가 신지우랑 사귀는 거야? 그런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단지 사귀는 게 아니라.. 말자 더 얘기하면 안 좋을 것 같다.

“여태 다 이야기하고 여기서 끊는다고. 어떻게 되는데? 결혼 해?”


신지우는 입사 때부터 여러모로 눈에 띄었던 프로그래머, 외모와 실력 모두 특출 나 인기가 많았지만 까칠한데다 말수가 적어 속마음을 알기 어려웠다. 


-내일 밥 먹자고 해봐. 

"늘 혼자 먹는 것 같던데."

-좀 더 적극적으로. 넌 맨날 그렇게 소극적으로 구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이거 왜 이러실까? 나만 이래? 당신이 나잖아.”

-그래서 지금 후회하고 있잖아! 내가!


또 짜증을, 아니 이번에는 화낸 것이다. 누구에게? 나에게? 자신에게? 결국은 그게 그거지만. 왠지 웃프다. 



신기한 것은 K가 느끼는 감정을 나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공감하는 수준이 아니라 감정전이 같은 것이었다. 


‘역시 동일인이라는 건가.’


K의 서운함, 화남, 근심과 걱정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나에게 전이됐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K가 삐져서 잠수 타는 날이 늘어날수록 그의 부재감 때문인지 K의 감정을 더 잘 알 수 있게 됐다. 


K는 진심으로 내가 신지우와 사귀는 것을 원했다. 


‘까짓 뭐, 나에게도 두 번의 기회는 줘야지.’


그래서 사무실 공용공간에서 만난 김에 슬쩍 물어봤다. 


“신대리,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을까? 맨날 밥 산다고 해놓고 지키지 않은 것 같아서..”


내 제안이 갑작스러웠는데도 신지우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반성하신다면 받아들이죠. 후후.”


K의 말이 맞았다. 까칠한척 해도 그녀의 호감이 느껴졌다. 


“그럼 내일 저녁 어떠신가?”

“내일은 선약이 있구요, 금요일은 시간 되세요?”

“금요일에?”

“안돼요? 혹시 데이트?”

“데이트는 무슨. 그러는 신대리는 괜찮아? 불금을 회사 선배하고 보내도?”

“저는 불이 없어서 괜찮아요.”


불이 없어서 괜찮아? 저걸 농담이라고. 이래서 공대생은… 그래도 귀엽다.


데이트는 나쁘지 않았다. 회사라는 공통의 화제가 있고 처음 본 사이도 아니니 밀당하느라 기력을 소진할 필요도 없었고. 


“AI기출문제 앱 있잖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거야 김주임 아이디어를 좀 디벨럽한 거 뿐인데?”

“팀장이 별로라고 했는데 강선배가 무조건 된다고 밀어 붙인 거라면서요. 안 해주면 아이템 들고 회사 나가겠다고 윗선 협박해서.”

“에이. 그건 사람들이 오버한 거고.”

“그때 독립했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그럴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K가 뜯어 말렸다. 그런 미래는 없다면서.


“회사 아무나 차리나. 할거면 제대로 준비를 해서..”


무안해서 괜히 물 한모금을 삼키는데,


“그래서 선배가 좋아요.”

“헉, 갑자기?”

“고백은 아니구요.”


신지우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본 것처럼. 

난 실망했지만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왜 였을까?


-신지우하고는 어땠어? 괜찮지?


또 오랜만에 나타난 K가 물었다. 최근 들어 K는 말없이 사라질 때가 많았다. 그 전에는 24시간 같이 있는 기분이었는데.


“깜짝이야. 예고 좀 하고 들어와. 어땠는지 다 본 거 아니야?”

-아니, 요즘 좀 그래.

“뭐가 그런데.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미래와 접속이 약하다든가.”

-그런 문제 아니고, 돌아갈 때가 돼서 그래.

“10년 후로 돌아간다고? 하긴 돌아가긴 해야겠다. 그래야 10년 후에 내가 다시 오지. 그러면 지금 10년 후의 나는 침대 위에 꼼짝 않고 누워 있나?”

-비슷해. 


난 K가 뭔가 감추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묻지 않았다. 이제까지와 같이 그는 말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않았다. K가 날 속일 이유도 없거니와 날 배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세상에 단 한명 100% 내 편이 있다면 그건 K, 100% 믿을 수 있는 사람도 K, 이건 1+1이 2라는 것만큼 명확해 보였다. 


“무리하지마. 갈 때 되면 정확하게 돌아가고.”

-내가 알아서 해. 그보다 강동하,

“왜?”

-내 말 잘 들어. 미래는 바뀔 수 있어. 넌 10년 후에 나처럼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 

“무슨 얘기야?”

-이번 일이 잘되면 넌 돌아올 필요 없다는 거지. 오히려 돌아온다면 그거야 말로 무한루틴의 오류에 빠지는 거야.


직접 코딩은 하지 않지만 프로그래머 출신인 나도 그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겠네.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너만 이런 재미를 보고 말이야.”

-농담할 기분 아니다. 이미 미래는 바뀌고 있어. 

“예를 들면?”

-AI기출문제앱도 몇달 이상 출시를 앞당겼고, 네가 팀장도 곧 될 것이고, 또….

“또 뭐?”


K가 또 말을 멈췄다. 잠수? 


“헤이, 또 자? 왜 말 안해?”

-크게 말하지마. 머리 울려. 커피템플도 그대로 있잖아. 원래 사장이 저거 다 접고 제주도에 내려갔거든. 

“뭐 그 정도를 가지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무튼 당신, 10년 후 강동하, 나하고 하나 약속하자.” 

-뭘?

“올 때는 맘대로 확 들어왔지만 돌아갈 때는 꼭 말하고 가. 아니면 내가 계속 찾을 거니까.”


의처증이 이런 것인가? K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데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 방법이 없다. 하지만 불렀다가 짜증내면 미안하고, 대답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더 불안하고. 나중에는 대답 안 할까 무서워서 확인도 못한다. 


게다가 확실한 것 하나. 

K에게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고, 우리 인생에 치명적일 만큼 중요하다. 

더구나 그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이전 20화 내 안에 나 있다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