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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l 13. 2024

내 안에 나 있다. -4-

파국

난 이정이 좋았지만 그녀와 연락하지 않았다.  

우선 K가 싫어하니까. 그가 싫어하는 건 눈치 보는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어쩐 일인지 요즘 들어 그의 감정에 동화되는 일이 많아서 K가 꺼리면 나도 꺼리게 되는 것이다.


한 손은 이정에게 문자를 넣고 다른 손이 그 문자를 지우는 이상한 상황이 계속 됐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한 여자를 두고 미래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감정을 가진다는 것인가?


“이봐, 10년 후 강동하, 이정이 왜 싫어?”

-싫지 않아.


의외로 담담한 대답이었다. 딱딱 받아쳐야 맛인데 풀이 죽은 듯한 그의 목소리가 싫다.


“괜찮아. 우리 사이에. 싫으면 싫다고 말해. 나 봐. 니가 싫다니까 딱 안 만나잖아.”


우울하다. 그는 우울하다. 왜냐하면 내가 우울하니까. 시작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10년의 시간 차가 있어도 K와 나는 하나다.


-그냥 만나고 싶으면 만나.

“진짜? 그래도 돼?”


내가 나한테 허락을 구하는 게 어색했지만 미래를 아는 내가 지금 나보다 현명한 건 사실이다.


-하지 못해 후회하는 것이,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 더 클 거 같아.

“죽어가는 노인네 같은 소리하지마. 그럴 거면 안 만날래. 신지우도 꽤 괜찮고. 당돌한 게 쏙 마음에 들어.”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아.


K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의 감정이 내게 전이 되듯이 나의 감정도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되는 것일까? 신지우는 괜찮지만 괜찮을 뿐이었다. 만나면 즐겁지만 즐거울 뿐이고. 여자로 느껴져도 여자로 느껴질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봐. 내가 아직 살지 못한 10년 동안 가장 후회되는 게 뭐야?”


그가 왜 회귀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당연히 피해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혼

“뭐시? 나 결혼해?”


그리고 끊겼다. 마치 전화가 끊기는 것처럼 툭.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 K가 내 안에 남아있는게 느껴졌다. 무척 피곤하고 작아졌지만.


‘괜찮아. 나는 아직 내 안에 있어.’


이정에게 연락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곧 연락할 것처럼 해놓고 문자 한통을 보내지 않았으니 그녀는 사기 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 사정은 전혀 모르겠지만 알아줘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도 난 전화를 선택했다. 텍스트를 보내고 답을 기다리는 고통을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차일 거면 1초라도 빨리 차이는게 낫고, 욕 먹을 거면 그래도 음성이 나았다.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면 상투적으로 하는 이 말을 우리는 얼마나 반복해 왔을까. 50년? 100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보세요'를 나는 몇 번이나 들었을까?

그 수많은 ‘여보세요' 중에 이렇게 빛나는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다. 단연코.


“여보세요.”


나의 여보세요는 자신이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이정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떤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차라리 불쾌함을 표시했다면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은 남아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만날 수 있을까요?”


전화하기 전에는 수백 가지 변명과 창의적인 수작을 구상했지만 내가 고른 말은 겨우 이것이었다.


“그러죠. 어디서?”


나는 그녀와 술이 마시고 싶었다. 커피를 마셔도 좋고, 밥을 먹어도 좋았겠지만, 술이 마시고 싶었던 이유는 시간이었다.

커피는 길어야 1시간, 밥은 2시간, 하지만 술은…. 끝이 없다.


K가 내 인생에 끼어든 이후 ‘끝'이라는 한 글자는 언제나 뒷덜미를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영화도 끝이 있고, 좋아하는 드라마도 끝이 있다. 연애도 끝이 있으며 인생도 끝이 있는데, 모두 끝이 있다는 것에 왜 이제서야 집착하지?


다시 한번 눈앞에 나타난 이정, 그녀는 수수하다 못해 아무 치장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복수인가? 자학적 복수?


/너 따위는 맨 얼굴로 만나도 괜찮아.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넌 나에게 배달앱 기사나 같아!/


그녀가 고른 약속장소인 위스키-bar 이름은 ‘courtroom’ (법정) 이었다.

이름이 뭐 이래? 날 재판하겠다는 거?


“제가 무슨 죄를 지은 겁니까?”


농담이랍시고 인삿말로 던진 것인데, 이정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사기죄.”


늦게 온 것도 아닌데 그녀는 꽤나 전에 왔는지 위스키를 보틀로 시켜 놓고 몇 잔 마신 상태였다. 역시 취했다. 취하지 않고서는 고작 이 정도 일로 사람을 사기꾼 취급을 하지 않을 테니.


“일찍 왔나 봐요? 아직 약속시간 5분 남았는데.”

“이거 좋아하죠? 글렌피딕 15년.”


대답은 않고 글렌피딕 보틀을 가리켰다. 시덥잖은 변명은 집어치우라는 것이다. 그러기로 했다. 죄가 가볍든 무겁든 죄인은 맞았다.


“여튼 내 취향은 기막히게 안다니까. 그거 마법이에요? 아니면 누구처럼 미래에서 오셨나?”


도무지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화나게 했다.

이정은 술잔을 탁 놓고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분노로 눈이 이글거린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눈이 어떻게 타는데?

니가 그런 눈을 못 봐서 그래. 정말 탄다니까. 빨갛게.


입사 초기에 회사를 그만 둔 동기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토록 누군가를 분노하게 하다니.. 이 역시 처음이다.


“너, 진짜 모르는 거지?”


갑자기 반말. 나는 당황했다.


“뭘요?”

“모르는 체하지마. 그러면 어떻게 미래에서 온 것을 알고 있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맥락도 없고 앞뒤도 안 맞고, 왜 반말로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멍하게 그녀를 보기만 했다.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답답하다며 따라 두었던 위스키를 번쩍 들어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저거 저거, 안되는데.

쿵.

술이 세지도 않으면서 그리 마실 때 알아봤다. 가만, 이정이 술이 세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이정씨, 이정 박사님.”

“괜찮아요. 안 취했어요.”


소리 나게 엎드리더니 그새 또 일어났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 있는 거에요?”

“무슨 일 있죠. 아주 많이.”


안심했다. 이 모든 소동은 나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그 모든 것이 전부 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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