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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l 07. 2024

내 안에 나 있다 -2-

이정

K의 말대로 AI 기출문제앱은 역대급 대박을 쳤다. 김주임은 특별공로상을 받았고 프로젝트 매니저를 자처한 나는 대내외적인 평판을 얻었다. 팀장은 잘리지는 않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 기여도가 낮아 지원업무로 빠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헤이, 내가 나한테 고맙다고 하려니까 좀 이상하기는 한데, 그래도 땡큐.”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그렇다고 내가 널 완전히 신뢰한다는 건 아니야. 이런 건 내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시겠지. 

이유는 모르지만 K는 심드렁했다. 

“왜 그러지? 무슨 일 있어? 두고 온 여자친구라도 보고 싶어?”

-됐고. 내가 맞았으니까 넌 약속이나 지켜. 

“그래, 말 나온 김에 좀 물어보자. 나 혹시 전세 사기 당하냐? 올해말이 계약만료이긴 한데 딴 데 안가고 그냥 연장하면 되잖아.”

-전세 사기 같은 소리 한다. 10년 전 내가 이렇게 유치했다니. 자괴감이 드는군. 

“아니면 코인? 내가 재산 털어서 코인이라도 사는 거야?”

-아니야.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나 여자친구는 언제 사귀어? 예뻐? 잠깐 너 설마 결혼 같은 거 안 했지? 그지?”

............ 

“왜 대답 안 해? 너 했어?”

............ 

“아, 진짜 불안해지려고 그러네. 우리 좌우명이 뭐야? 결혼은 미친짓이다. 이걸 잊은 건 아니겠지?”

............ 

“상관없어. 내가 안 하면 그만이지. 네가 진짜 미래에서 왔건 말건 내가 결혼 안 하겠다는데.”

-그 말 꼭 지켜라. 

“이건 뭐지?”

-결혼 안 한다며? 그 말 지키라고.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데? 이혼해?”

-결혼 안 해. 그러니까 너도 하지 말라고. 내 개인사가 바뀌는 건 싫으니까. 

“그런 거라면 뭐. 말하고 말 것도 없어. 전혀 생각 없으니까.”

-그리고 너, 오늘도 프로틴만 먹고 헬스 갈거지? 그거 하지마. 아무 소용없어. 

“뭐가 소용없어. 아, 나 알았어. 딱 알았어. 말하지마. 미래에는 한 알만 먹으면 군살 싹 빼주는 약이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운동할 필요없다고. 오케이. 오늘부터는 맘대로 먹는다. 바로 치킨부터 조지러 가자.”

-뭘 조져?

“치킨.”

-치킨을 조지다니, 10년 전의 내가 그렇게 저급한 용어를 썼다고?

“기억 안나?”

-전혀.

“그럴 리가.. 니가 난데.”

-그러게.  

그러다 그날이 왔다. 2023년 7월 6일, 그녀를 처음 만난 날. 

“너 전생에 무슨 죄지었냐?”

-무슨 소리?

“이렇게 일했는데 아직도 목요일이야. 금요일인줄 알고 출근했다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아냐?”

-..... 그랬지. 

“오, 역시 내 맘 알아주는데?”

-(잠시 멈췄다가) 강동하, 우리 약속 기억하지?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는 거. 

“그랬나?”

-시침 떼지 말고. 

“미안. 당연히 기억하지.”

-그게 오늘이야. 좀 있다가 박이사가 와서 어떤 컨퍼런스에 대신 참석하라고 할 거야. 그거 거절해.

“왜?”

-묻지 말고. 그게 조건이었잖아! 

K의 짜증이 심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내고 성에 안차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몇 시간씩 대답을 안 했다. 그러니 눈치를 볼 수밖에. 내가 미래의 나한테 눈치를 보는 괴상한 상황이었지만. 

K가 예고한 대로 오전 10시가 지나자 개발담당 이사가 찾아와서 자기 대신 컨퍼런스에 다녀오라고 주문했다. 

“무슨 컨퍼런스인데요?”

“양자컴퓨터의 미래와 시간의 연속성 대해, 오늘 강사가 꽤 유명한 여자야. 어렵게 구한 티켓이니까 시간 늦지 말고. 다녀와서 내용 정리해서 공유해. 나한테도 한부 이메일로 주고. 수고.” 

개발이사는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렸고 나는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거절하라고 했잖아! 

주변에 팀원들이 있어서 나는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조그만 소리로 답했다. 

“너도 상황 봤잖아. 말할 틈을 줘야 거절을 하지. 그런데 강사가 여자라는데 아는 여자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완전히 삐졌다. 그냥 뒀다가는 몇 시간이 아니라 그 이상도 잠수 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 무렵 나는 K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 내가 미래의 나에게 의존한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마약도 아니고 술도 아닌데. 

거절하는 건 거절하는 것이고, 강사가 여자라는데 호기심이 생겼다. 무려 유학파 양자물리학 공학자 아닌가?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전공조차 없는데. 

인터넷에 검색하니 그녀와 관련된 뉴스 기사가 꽤 나왔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양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사이언스가 선정한 올해 세계에서 주목 받는 물리학자 중 한명이다. 

이정,

“대박, 나랑 동갑이야. 이 정도면 얼굴도 예쁜 편 아니야?”

-신경 끄시지. 너랑 아무 상관없는 여자야.

“누가 뭐래? 예쁘다는 말도 못해? 그런데 어디서 좀 본 듯.”

-그럴 리가. 나도 처음인데.

“그래? 그럼 맞겠지. 어쨌든 분위기가 좀 뭐랄까...”

-어서 가서 못 간다고 말이나 해. 더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것 없어.

“알았어. 간다. 간다고. 이건 뭐 시어머니도 아니고, 여친도 아니고, 세상에 미래의 자신한테 잔소리 듣는 인간은 나 밖에 없을 거야.” 

혼자서 투덜대며 개발담당 이사실에 갔더니 이미 나가고 없었다. 

“없는데?”

-전화해.

“이런 일로 어떻게 전화해?”

-하라니까(짜증)

“아, 진짜. 무슨 일인데 그래? 말이나 좀 해주고 시켜!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내가 10년 있으면 너 되는 거라며? 그럼 어차피 다 알게 될 거 아니야?” 

통했나? K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피해 옥상 쉬는 공간으로 나갔다. 

“가는 길에 교통사고라도 나나?”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말 안 해 주는데? 안 해주면 안 해주는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니야.”

-지금 이 시간에 네가 알면 계획이 틀어져. 아니 무의미해져. 그래서 그래. 그러니까 제발 이번만 내말 듣고. 아니 나를 믿어. 나 믿지?

“그야 당연히 믿지. 널 안 믿으면 누굴 믿어?”

대답이 없었다. 삐졌나? 조금 고민하다가 개발담당 이사에게 전화했다. 이럴 만하니 이럴 것이다. 그런데 뭘까? 10년의 시간을 거슬러 자기 의식을 보낼 만큼 중요한 일이. 

문제가 생겼다. 이사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중요한 미팅이 있다는 건데. 일단 문자를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팀장을 찾아갔다. 대신 컨퍼런스에 가달라는 부탁을 할 참이었다. 

“강수석한테 시킨 일을 내가 하면 이사님이 좋아하시겠어? 가뜩이나 미운털이 박힌 판에. 안돼. 직접 가.” 

그리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곧 문책성 인사가 날 것이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더구나 팀장 자리에는 내가 가는 것으로 내정됐다. 

“K 봤지? 어쩌지? 대신 갈 사람이 없다는데. 이사는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고.” 

잠잠, 

“뭐야, 이게 그렇게 삐질 일이야? 내가 안 간다고 했잖아. 다만 지금 상황이 좀 꼬인 것이고.” 

잠잠, 

“끝까지 아무 말 안 한다 이거지? 몰라. 나도 이판사판이야.” 

시간을 보니 지금 출발해도 컨퍼런스에 늦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우선 출발. 

사실 가는 중이라도 K가 깨어나 말리면 차를 돌릴 생각이었다. 까짓 컨퍼런스 한번 안 갔다고 짜를 것도 아니고. 차 막혔다고 하든가, 핑계될 건 많았다. 하지만 지정된 자리에 앉고 이정 박사가 소개를 받고 연단에 오를 때까지 K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거면 알아서 말하겠지.’ 

이제까지 늘 그래왔으니 K가 알아서 제지할 것이라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컨퍼런스가 시작됐다. 내 시선은 당연히 이정 박사 그녀에게 고정됐다. 

내 자리는 앞에서 네 번째 줄, 연단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특히 연단에는 밝은 조명이 있어 나는 그녀를 볼 수 있지만 그녀는 날 보기 힘들었다. 나를 감추고 관찰하기 딱 좋은 상황. 

그녀의 얼굴 윤곽과 머리카락의 스타일, 목의 길이와 색깔, 어깨 넓이, 블라우스 취향, 허리 형태, 앉은 모양새 등 내 시선이 전신 스캐너처럼 그녀의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훑는 동안 낭낭하고 익숙한 톤의 목소리가 익숙한 바람의 온도로 내 귓속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한 마디로...... 

마음에 들었다. 

아, 큰일 났다. 지금 이 상황에서 첫눈에 반하면 어쩌자는 거냐? 중딩도 아니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내 얼굴이 상기된 것을 들킬까봐 고개를 살짝 숙였다. 더이상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 다른 패널 순서가 됐을 것이다. 

어느 정도 들뜬 마음이 진정됐을 때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이정 그녀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발언 시간이 아니긴 하지만 다른 패널에 집중해야 할 그녀가 관람석에 앉아 있는 날 보다니.. 착각일까?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은 컨퍼런스가 끝나고 금세 알게 됐다. 쉽사리 회의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데 눈앞에 이정이 딱 나타났다. 나는 기적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녕하세요. 저는... ” 

내가 왜 인사를 하고 있지? 

“알아요. 계속 저를 보고 있었죠?”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밥 사요. 컨퍼런스 준비 때문에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너무 배가 고파서.”

“지금요?”

“안 되나요?” 

다른 건 몰라도 운명적인 만남은 있다. 첫눈에 반하는 것도 있다. 10년 미래에서 내가 나를 찾아오는 마당에 이 정도가 없겠나? 

“가시죠.” 

무조건 고고, 상황 파악도 하기 전에 내 입에서는 ‘예스’가 나왔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어디로요?”

“어디든요.”

“나 많이 먹는데요. 어제 한국에 와서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많이 죄송하니까 많이 사겠습니다.”

“회사 들어가 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

“퇴근했습니다.” 

그때 이미 나는 이정,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쩌면 더 이전부터. 아니면 미래에서.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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