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비천하고 명예는 악하며 질투는 파멸한다.
쇼펜하우어의 쓰라린 명언이다. 그러나 오롯이 진정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 유산으로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고 말년에는 명예도 얻었다. 그의 철학적 비관주의가 바그너를 비롯한 예술가들과 니체 등 젊은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쇼펜하우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말이다. 질투는 파멸한다.
쇼펜하우어는 꽤 많은 사람들을 질투했다. 괴테, 셸링, 그중에서도 베를린 대학에서 함께 강의했던 헤겔에 대한 질투는 남달랐다. 헤겔의 변증법이 모호한 언어와 복잡한 언어를 사용한 추상적 철학일 뿐이라고 비판했던 쇼펜하우어는 그의 학문적 무지를 깨우쳐 주겠다며 동시간대에 강의를 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헤겔의 강의에는 학생들이 넘쳤지만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선택한 학생은 몇 명 되지 않아 결국 폐강하고 말았다.
실망한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 글쓰기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복잡한 인간 사회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 정-반-합 개념에 끼워 맞춰 역사는 무조건 발전하게 돼 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도 대중은 헤겔에 열광한다. 반면 칸트를 계승하며 삶의 고통과 의지, 인간 경험을 중시한 자신의 철학은 보려 하지도 않는다.
단지 헤겔만 질투하고 미워했을까?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을 미워하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미워하게 돼 있다. 대중에 실망한 쇼펜하우어는 사교 모임에 나가는 것을 꺼렸고 인간 혐오적인 염세주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끊임없이 욕망하며 잔인한 존재다. 각자 욕구를 충족하려 갈등하다 보니 결국에는 고통과 실망을 야기한다. 쇼펜하우어의 질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후대에 와서 헤겔의 변증법이 어떤 비판을 받든, 쇼펜하우어의 지적이 옳았든, 지식인이라면 쇼펜하우어 책 하나는 갖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든, 이런 건 다 상관없다. 그러면 뭐 하나? 그는 이미 죽었는데. 그리하여 파멸한 것인가?
돈을 벌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비천한 면이 드러날 수 있다. 명예를 좇다 보면 권력을 탐하고 불합리와 타협해 악해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질투는 왜 파멸하나? 경험담일까? 쇼펜하우어는 어떻게 파멸했나?
영화 <토탈 이클립스>는 천재 시인 랭보와 베를렌의 모순적 관계를 다루고 있다. 베를렌은 랭보의 천재성에 매료됐지만 그와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질투에 시달린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데 랭보의 창의성은 어찌 이리 성숙한가? 랭보가 쏟아내는 영감은 놀랍지만 베를렌의 예술세계를 침식하고 그보다 빠르게 성장하며 마침내 전부 부숴 버릴 것 같다. 아무리 좋아도 나를 파괴하는 것을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베를렌은 술에 취해 랭보에게 총을 쏘았고 그 대가로 감옥에 갇혀 폐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말년에는 슬럼과 공공병원을 전전하면서 어쩌다 돈이 생기면 싸구려 압생트를 마시며 죽음을 기다렸다. 바로 파멸이다. 랭보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 질투가 부른 결과이다. 타인이 나를 파멸시킬 수 있지만, 파멸에 이르는 건 결국 자신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랑 대신 미움을 선택했다. 대중에게 사랑받지 못하니 평생 대중을 혐오하며 지적 자산을 소모했다. 그것도 열심히. 그러나 인간을 혐오하면 결국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겨우 남을 미워하는데 온 힘을 쏟는 자신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힘이 든다. 질투와 미움의 대가다.
문제는 인간에게는 자기 파괴적인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의지는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힘이지만, 동시에 파괴의 씨앗을 안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을 불러오는 의지에 지배당하는 존재다.”
쇼펜하우어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항상 결핍을 느끼고 타인과 경쟁하며 갈등하다가 결국은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질투는 슬픈 경쟁이다. 상대는 쳐다보지도 않는데 혼자 경쟁하고 갈등한다. 심지어 파멸할 것을 알면서.
자기 파괴는 유혹이다. 질투 역시 유혹이다. 벗어나기 힘들다. 마땅히 나보다 잘난 사람은 질투하지 않는다. 난 카잔차키스를 질투하지 않는다. 헤밍웨이를 질투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를 질투하지 않는다. 내가 질투하는 사람은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별로 잘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그 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내가 초라해진다. 하아, 어디까지 유치해지고 어디까지 파멸하려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 벌써 내가 한심해진다. 파멸에 또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인정하고 포기하느니 파멸을 선택한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나의 자기 파괴적인 욕구며 의지다. 역시 벗어날 수 없다. 질투를 포기할 수 없다.
내 글은 나를 닮았고 결국에 버려질 것이다. 파멸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길 바란다. 나보다 잘 나간다고 부러워할지언정 최소한 질투하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