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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Nov 11. 2024

미워할 권리, 미움받을 의무

어렸을 때 나는 세계 멸망을 꿈꾸는 미친 과학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화를 수호하는 슈퍼맨의 목에 크립토나이트 광석을 매달아 무력화하고 굳이 핵폭탄을 떨어뜨려 캘리포니아를 가라앉히겠다는 렉스 루터의 심리를 알 수 없었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했고 인류를 파멸시키는 길로 이끌었을까? 그냥 미친 게 아니라면.  


인류를 적대시하고 세계 파괴를 꿈꾸는 픽션 속 캐릭터들은 의외로 많다. 영화 <왓치맨>의 오지맨디아스, 그는 방사능을 이용해 세계 인류를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매트릭스>의 요원 스미스는 인류를 바이러스에 비유하며 적대감을 드러내고 <아이로봇>의 인공지능 VIKI는 인간의 평화를 지키라고 명령했더니 로봇이 인간을 지배함으로써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어벤저스>의 울트론은 인류 자체가 지구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결론 내리고 아예 인간을 멸종시키려 했다. 


유사한 가치관이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된 사례가 <어벤저스>의 최종 빌런 타노스다. 타노스는 인피니티 스톤을 이용해 우주 생명체의 수를 절반으로 줄였는데 목표는 나름 숭고했다. 우주 생명체의 숫자가 과잉이라 그냥 두면 모두 자멸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작가는 왜 무자비한 파괴와 대량학살을 목표로 하는 캐릭터들을 만들었을까? 단지 주인공이 맞서 싸울 악의에 찬 대적자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악당들의 논리가 지나치게 꼼꼼하고 그럴듯하다. 혹시 작가는 악당의 입을 통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인간들에 대한 분노, 살면서 겪게 된 주변 인간에 대한 실망과 미움을 말이다.   


솔직히 말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러지 않나? 세계가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인간들 전부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차이가 있다면 작가가 창조해 낸 캐릭터들은 혼자서도 그럴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혹시 작가는 현실에서 할 수 없으니까 자기가 창조한 세계에서 맘대로 미워하며 학살하고 만족하고 자위한 것 아닐까? 어떤 논리를 설파해도 비판받지 않을 테니까. 이건 그냥 영화일 뿐이야, 지어낸 이야기라고. 내 생각이 절대 아니야. 회피하면서. 


감정이 없다면 인간은 생존하기 어렵다. 심리학자 폴 에크만은 두려움, 애정, 기쁨 같은 기초 감정이 생존과 적응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감정이 의사결정에 필수적인 요소라면서 감정이 없다면 사람은 복잡한 결정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감정 반응을 관장하는 뇌 부위가 손상된 환자들은 이성적 사고는 가능했지만 사소한 선택에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감정은 특히 과거 경험에 근거해 빠른 결정을 내리는데 필수적이다. 컴퓨터로 치면 램(ram)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일일이 책을 뒤져 정확한 근거를 찾기보다 기억에 의존해 생존에 필수적인 신속한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위험을 회피하고 경계하도록 하며 애정은 사회적 관계와 결속을 다지게 하고 기쁨은 보람을 느끼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그중에서 미움은 삶의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한다.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복수심 하나로 시련을 견디며 더 큰 힘을 갖게 되는 스토리는 뻔한 클리셰로 느껴질 만큼 우리에게 익숙하다. 반면 미워할 권리마저 없다면 정말 모든 것을 잃는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힘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냥 내버려 둬. 그런 마음도 없다면 어떻게 살겠어?"

"하지만 선생님, 선생님 잘못이 아니지 않나요? 그 아이도 알아야 돼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내 잘못이 아니라도 그 아이의 가족을 빼앗은 것은 맞아. 그러니 날 미워하게 놔두라고. 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느끼는 다소의 억울함 정도는 적은 비용이야."


강자라면 이 정도의 관대함은 있어야 한다. 미워할 권리를 뺏지 말고 미움받을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우주가 생긴 이래 강자가 승리한다는 법칙은 틀린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겼다는 것이 곧 정의와 바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울하게도 옳고 그름의 가치관은 계속 변해왔고 또 변할 것이다. 그러니 강자가 자신의 행위를 정의로 포장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패자는 진 것도 억울한데 '틀렸다'는 말까지 듣는다면 살 수 없지 않을까? 


이 세계에 너무 잘 적응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 세계가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만든 질서와 규칙이라는 게 억압으로 느끼는 사람도 존재한다. 인생 게임에 졌지만 자기 잘못이라 인정할 수는 없다. 이런 사람들을 사회 부적응자라 부른다. 이른바 사회 부적응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잘 살아가기 힘들다. 이 세계를 바꿀 수 없으니 부적응자의 혁명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냥저냥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부적응자라도 최소한 세계를 원망하고 잘 적응해 사는 인간들을 미워할 권리는 있는 것 아닐까? 아니면 그마저도 하면 안 되나? 


모르겠다. 누구보다 이 사회에 잘 적응해 사는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때 나는 사회 부적응자다. 이 세계가 전혀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게 느껴진다. 뭘 해도 자유롭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텅 빈 모니터만 쳐다본다. 영화를 볼 수도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 그럴 때는 숨도 못 쉴 것 같다. 


참기 어려운 분노가 쌓이지만 아무 데서나 표출할 수 없다. 표출하는 순간 부적응자라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다. 실패자로 낙인찍힌다. 그리하여 혼잣말이 늘었다. 혼자 화내고 욕하고 미워한다. 

누구도 나의 미움을 금지할 권리는 없다. 그나마 내 생각은 자유고 금지된 생각이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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