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슬픔이 가득 차서 내가 왜 우울한 지조차 알 수 없다. 공간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감정에도 여백이 있어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유도 모른 체 초점 없는 눈으로 빈 모니터만 응시하다 보면 살아 있다는 기분도 실감하기 어렵다.
텅 비어버린 머릿속은 공허한 내 인생을 표상한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살아갈 핑계를 허겁지겁 찾는다. 급류에 쓸려 내려가면서 강물에 뜨는 널빤지를 구하는 모습과 같다. 오늘은 누굴 위해 살까, 내일은 무엇을 위해 살 수 있을까? 재밌는 영화라도 발견한 날은 운 좋은 날이었다. TV 시리즈라면 더욱 좋다. 훨씬 오랜 시간을 견디게 해 줄 것이니. 책은 금세 지친다. 읽는 데에는 수고가 더 필요하다. 작가는 텍스트를 건넬 뿐 이미지와 그 나머지 것을 구현하는 것은 내 상상력이다.
"이어서 나의 망설임, 그의 대담함, 나의 오해가 있었고, 그의 차에서 나는 소음, 나의 두려움, 밤의 해변, 밤의 우리 마을, 나의 마당과 장미 덤불, 염자 덤불이 있었으며, 그에 이어 내 울타리, 내 집, 내 방, 철제 의자, 우리의 맥주, 우리의 대화, 그의 잘못된 사실 전달, 다시 그의 대담함이 있었다."
-이야기의 끝, 리디아 데이비스-
더욱이 잘 된 문장을 보면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과 이런 글을 쓰지는 못 할 것이라는 조급함, 이미 성공한 작가에 대한 질투 같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다시 아무것도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답답하다. 우울감이 가득 차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하루에 몇 번씩 크게 심호흡을 반복하며 왼쪽 가슴을 토닥인다.
'괜찮다. 괜찮다. 이렇게도 살 수 있어.'
어제는 스팀 게임 사이트에 들어가서 할인 이벤트 중인 게임 몇 개를 다운로드했다. 게임을 설치하고 실행하고 채 10분이 되지 않아 금세 질렸다. 그보다는 게임이 출시된 배경과 개발 과정, 게임 속 세계관이 어떤지 검색한다. 역시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새로운 스토리다. 생각하지 못했던, 감히 상상해 보지 않았던 세계관이나 스토리에 매료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어둑해진 하늘이 보이고 조금 어지럽고 허기를 느낀다.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그토록 염원했던 나의 시간은 오지 않은 채 내 것만 또 잔뜩 내주고 말았다. 이런 식이다. 뭐라도 하면 손해가 난다. 그래서 더욱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달콤한 초코칩을 가늘게 씹어 단맛을 충분히 느끼면서 목에 넘긴다. 우리 집에서 나 말고는 아무도 과자를 먹지 않는다. 아내는 심지어 단맛이 싫단다. 후배는 과자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선배는 그렇게 운동하면서 왜 단 거를 끊지 못해요?"
"글쎄, 내 인생이 제일 써서 그런가?"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이 이태원에 차린 술집 이름이 '단밤'이다. 촌스럽게 왜 단밤이냐고 여주가 물었더니 남주도 비슷하게 답했다.
"별 이유 없어. 그냥 조금만 더.. 쓰린 밤이, 내 삶이 달달했으면 했어."
가슴이 아팠다. 비록 박새로이는 픽션 속 인물이지만 실제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쓰라릴까? 얼마나 쓰면 고작 '단밤'을 꿈꾼다는 말인가?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질문이 있다. 실은 이 질문이 두려워 나의 쓸쓸함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넌 뭐 그렇게 불행하고 맨날 불만이니.
모두가 각자만의 사정이 있고 각자만의 우울을 보살피며 살아간다. 모두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적어도 그렇다. 내가 나를 설명할 필요 없지만 사람들은 잔인하게도 설명을 요구한다. 넌 왜 슬프니? 그 정도 가졌으면서.
가졌으면 우울할 수 없나? 나보다 덜 가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하면 난 불행하지 않은가?
내 소설은 나를 닮아 주변을 겉돈다. 이 사회의 비극이나 고난을 외면하고 제법 '성공한' 인간들의 우울한 선택을 묘사한다. 왜 너의 선택은 그리하였는지, 후회하지 않는지, 그리하여 평안한 지. 나의 의식을 의심하고 존재의 의미를 갈망한다.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대답에 닿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읽히지 않는 소설이 된다 해도 나를 위해 쓰고, '내가 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자위하지만 솔직히, 충분하지 않다.
세상에 읽히지 않는 소설이 존재할 필요 있나? 그걸 쓸 필요 있나?
내 존재는 이유가 없어도 내 소설은 소설의 본질을 벗어나지 못한다. 읽혀야 소설이다. 본질을 상실한 소설을 쓰느니 차라리 게임이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똑같이 무의미한 행동이니 말이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살아갈 이유를 찾는 건 온전히 자기 몫이다. 샤르트르는 있는 것들이 그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구토를 느꼈다. 냇가에 돌멩이, 흙속을 파고드는 미세한 나무뿌리,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로 존재하는 건 딱히 이유가 없다. 샤르트르와 달리 신이 죽고 한참 뒤에 태어난 우리는 그 사실이 딱히 놀랍지 않다. 구토를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샤르트르가 부여한 과업이 버겁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데.
스스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보편적인 존재 이유가 있다면 책에 쓰여 있거나 인터넷에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찾는 수고를 할 필요 없다.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다. 초등학교는 아니라도 중학교에 들어가면 윤리 교과서 같은 곳에 딱 적혀 있으면 좋겠다. '챕터 1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이것으로 시험도 치고 정답을 맞혀야 졸업시켜 주는 것이다.
도무지 왜 보편적인 존재 이유가 없을까? 이 질문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대략 이런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존재 이유가 없는 이유라니... 이 정도면 이유를 찾는 강박증에 가깝다)
우선은 인간을 창조한 상위종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찾지 못했거나, 상위종이 있는데 우리를 방관하거나.
만약 인간이 컴퓨터를 만든 것처럼 인간을 만든 '신'이 있다면 만든 이유가 있고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존재 이유가 된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다시 제자리.
하여튼 누구도 인간을 작정하고 창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전하게 '버려진 상태'로 존재한다. 혹은 '던져진 존재'다. 그러니 존재 이유가 없다.
두 번째는 인간이 다양해도 너무 다양한 탓이다. 백 명이 있으면 백 명이 다른 생각을 하고 50억 명이 있어도 똑같은 인간은 하나도 없다. 가치관이 비슷할 수 있어도 완전히 같을 수 없다. 쌍둥이로 태어나도 자라난 환경과 경험, 형성된 신념이 다르기 때문에 삶의 이유가 똑같기 어렵다.
보편적 존재 이유가 없으니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인생의 궤적이 점점 달라져 그나마 보편적 인간성도 보존하기 어렵다. 절대적 존재가 나서서 '이렇게 해'라고 정해주지 않으니 법망을 피하거나 무시하면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어떤 자는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뻔뻔하게 말한다. 인간의 법을 어겼을 뿐이지 하늘의 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 이 모두 보편적 존재 이유가 없는 부작용이다.
다행히 세상에는 대범한 사람들보다 소심한 사람들이 많아 사회가 유지된다. 안 그랬으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토마스 홉스의 표현대로 이 세계는 개판이 됐을 것이다.
존재 이유가 없는 게 좋은 점도 있다. 따지고 보면 자유라는 것도 존재 이유가 딱히 없으니 가능한 개념이다. 존재 이유가 딱 있고 그것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면 개인의 선택은 자유로울 수 없다. 부여된 존재 이유에 타당한 방식으로 선택해야 하니까 선택이 제한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존재 이유가 없으니 마땅히 해야 할 것도 없고 그만큼 자유롭다.
다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뭘 해도 틀린 것 같은 불안감은 자유의 대가 중 하나다.
샤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스스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존재 이유를 찾지 않을 자유를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힘들다.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를 통해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지 않을 경우 '불성실(Selbsttäuschung)'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요약하자면, 삶에 대한 고통과 불안을 인정하는 동시에 각자의 삶을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라. 보편적인 존재 이유는 없지만 그 자유 속에서 자신만의 이유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보편적인' 가치다. 보편적 존재 이유는 없어도 보편적 가치는 있다. 이런 뜻인가?
어쨌거나 죽지 말고 잘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존재 이유 없음에서 오는, 자유에서 비롯된 불안과 우울과 슬픔은 어떻게 할까? 그냥 극복하라는 말일까? 무조건?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내 존재 이유도 찾아야 하고 불안과 우울도 극복해야 한다. 물론 명확한 존재 이유를 찾는다면 불안과 우울이 어느 정도 극복되니 한 번에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찾은 존재 이유가 얼마나 갈까? 내가 찾은 존재 이유가 '맞다'라고 해줄 신이 없으니 계속 변하는 것은 감당해야 한다. 그때마다 새로 이유를 찾고 불안과 우울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아, 이제 진짜 그만 노력하고 싶다!
그냥 다 생각 안 하면 어떨까? 우울하지 않게 불안하지 않게 다른 '멍청한'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생각 스위치가 없어 생각을 끄지는 못하니 다른 일에 집중하며 회피하는 방법이다. 어차피 답 없는 생각, 계속 변하는 결론,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 없지 않나. 좀 바보 같아도 의미 없어도 명랑하게 일상에 매몰되는 것이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고통받는 인간이 되고 만족한 바보가 되느니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낫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시금석처럼 따르며 평생을 불만 가득한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게 살아왔다. 그 소크라테스는 우울증에 걸리기 직전이다. 작금의 세상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틀렸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이별이다. 차라리 만족한 바보로 살겠다.
'나는 왜 이렇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과 우울은 아예 싹을 자른다. 대신 점심을 맛있게 먹고 새로 찾은 드라마를 정주행 하며 할인 판매하는 게임을 다운로드해 몇 시간이고 즐겁게 보낸다. 햇볕이 부드러워지면 산책을 하고 선선한 바람을 맞는다. 외면했던 소일거리를 찾고 새로운 뭔가를 배워 보는 것도 좋다.
신이 보증하지 않으니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지만 슬픔을 극복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말은 맞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극복하지 못하고 빠져들 뿐이다.
진짜 중요한 일은 다 하게 돼 있다. 걱정거리가 현실화되면 어쩔 수 없이 매달리게 된다. 그런 건 그때 하고 지금은 일단 웃자. 꼭 즐겁지 않아도 명랑하게 살 수 있다. 즐거움은 즐거운 건수가 있어야 하지만 명랑함은 태도일 뿐이다. 고민거리는 회피한다. 그리고 밝고 명랑하게!
할 수 있다.